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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文香世談] 과제가 된 삶, 소로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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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6. 2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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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의 숲은 유난히 고요하다. 호수 위에는 은빛 물안개가 천천히 피어오르고, 물가 나무들은 세상의 소음을 잊은 듯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사람들은 대개 숲을 '잠시 쉬어가는 장소'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숲은 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가장 정직하게 마주하는 자리다.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스물여덟 살에 매사추세츠 콩코드 근처 월든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한다. 그는 '월든'에서 "나는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며 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자연에 대한 찬가라기보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자기 삶에서 멀어지는가를 묻는 조용한 선언에 가깝다.

소로는 문명의 중심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을 낭만적 은둔으로 읽는 시선도 있지만, 그의 선택은 오히려 정면 돌파에 가까웠다. 그는 묻는다. 왜 인간은 자기 삶을 스스로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더 나은 집을 위해 시간을 팔고,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삶을 저당 잡히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문명은 분명 갖가지 편리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욕망의 속도를 올려 우리를 끊임없이 앞으로 밀어낸다. 소로는 그 흐름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실험한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얼마나 되는가. 그 질문은 단순하지만 쉽게 견딜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 그가 숲에서 찾고자 한 것은 가난이 아니라 삶을 단순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유였다.

그는 숲에서 거창한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사소한 것들을 오래 바라본다. 호수 위로 번지는 빛, 바람에 흔들리는 수면, 계절마다 달라지는 숲의 냄새를 기록한다. 겨울에는 얼어붙은 호수의 깊이를 재고, 봄에는 녹아내리는 흙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어느 날 그는 개미 두 마리가 싸우는 장면을 들여다보며 인간 사회를 떠올린다. 또 기차가 숲 옆을 요란하게 가로지르는 순간, 산업문명이 인간의 감각을 어떻게 압도하는지를 감지한다. 그것은 자연 관찰이 아니라 감각의 회복에 가까웠다. 잊고 있던 느림이, 그에게서는 하나의 인식 수단이자 삶의 방식이 된다.

오늘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속도와 화면에 기울어 있다. 우리는 걷는 중에도 무언가를 확인하고, 침묵 속에서도 끊임없이 정보를 소비한다. 혼자 있는 시간은 공백처럼 느껴지고, 깊이 생각하는 일은 비효율로 취급된다. 그러나 생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생각은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고, 아무 득이 없는 곳에 머물며, 때로는 목적마저 잊은 채 천천히 배회한다. 인간 정신은 본래 느린 존재다. 느림이 허용되는 곳에서 비로소 깊은 사색이 가능하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아무 목적 없이 멈추어 서 본 적이 있는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무위의 시간을 끝까지 견뎌 본 적은 있었는가.

"당신은 정말 자기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오늘날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 선택의 많은 부분은 이미 설계된 경로 위에 놓여 있다. 알고리즘은 취향을 분석해 다음 욕망을 제시하고, 우리는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자신을 조정한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요구는 점점 정교해진다. 그 과정에서 삶은 경험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된다. 어느 순간 살아간다는 일은 삶을 수행하는 과제로 변해 버린다.

소로는 이 지점에서 흐름을 거슬러 오른다. 그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곧 풍요는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불필요한 욕망이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든다고 본다. "우리 삶은 사소한 일들로 허비된다. 단순화하라." 이 문장은 명료하지만, 그대로 따르기에는 불편하다. 왜냐하면 오늘의 사회는 소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 더 눈에 띄는 것이 가치의 기준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그 경쟁에는 끝이 없다. 비교는 멈추지 않고, 욕망은 계속해서 형태를 바꾼다. 소로가 숲에서 실험한 것은 단순한 절약이나 금욕이 아니라, 그런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는 정신의 독립성이었다.

이와 같은 사유는 인공지능 시대에 오히려 더 날카롭게 다가온다. 우리는 점점 더 빠른 답을 받는다. 질문이 채 형성되기도 전에, 이미 정리된 결론이 도착한다. 그러나 중요한 물음은 그렇게 다뤄질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이런 질문은 효율적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붙들고 있어야만, 때로는 답 없이 견디는 시간 속에서만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깊이 고립되어 있다. 타인의 삶은 실시간으로 공유되지만, 자기 내면은 점점 낯설어진다. 소로가 지키려 했던 것은 자연이라기보다 자기 정신의 독립성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인간은 조용한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을 암기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삶 속에 스며든 조용한 절망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만큼 충분히 멈추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더 빨리 살아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속도를 높일수록 삶이 더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너무 빠르게 지나온 것들은 우리 안에 오래 남지 않는다. 조용히 걷고, 호수에 비친 구름 한 조각을 오래 바라보고, 계절이 바뀌는 나무 곁에 잠시 멈춰 서 있는 시간만이 비로소 우리를 형성한다. 어쩌면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지나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새벽안개가 완전히 걷히기 전, 아직 세계가 뚜렷해지지 않은 그 시간처럼 우리는 너무 서둘러 자신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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