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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화 칼럼] 에어컨과 더위: 기술이 자연의 제약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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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8. 1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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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석좌교수
올여름은 유난히 폭염이 심했다. 서울의 기온도 40도를 넘었다. 아침에 지하철역까지 걸어가 냉방된 전철에 올라타면 에어컨의 고마움을 새삼 느낀다. 에어컨이 없었다면 한여름에 만원 전철로 출퇴근하고 사무실에서 평소처럼 일할 수 있을까. 우리는 냉난방이 잘되는 생활환경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올여름 세계 곳곳이 폭염에 시달리면서 에어컨을 둘러싼 논쟁도 뜨겁다. 특히 유럽이 그렇다. 유럽은 세계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폭염 관련 사망의 36%가 집중되어 있다. 유럽 가구의 에어컨 보급률은 23%에 불과하다. 프랑스에서는 학교와 병원, 노인요양시설에 냉방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과 에어컨이 전력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을 늘려 지구를 더 덥힌다는 반론이 맞서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제 에어컨이 거의 생활필수품이다. 고온다습한 여름에 에어컨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에어컨은 단순히 더위를 피하기 위한 편의시설일까. 사실 에어컨은 기후라는 자연의 제약을 완화하고 경제활동의 시간과 공간을 넓힌 중요한 기술혁신이다.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리콴유는 1999년 싱가포르 성공의 요인을 묻는 질문에 뜻밖에도 에어컨을 꼽았다. 에어컨이 "열대지역에서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가하면서, 총리가 된 뒤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공무원들이 일하는 건물에 에어컨을 설치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무더위와 높은 습도 속에서도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공공부문의 효율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에어컨의 경제적 의미는 사람을 시원하게 해준 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얼마나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를 바꾸었다. 더위는 육체노동뿐 아니라 집중력과 인지능력도 떨어뜨린다. 국제노동기구는 열 스트레스로 2030년 세계 노동시간의 2.2%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이처럼 세상을 바꾼 기술도 처음부터 사람을 시원하게 하기 위해 발명된 것은 아니었다. 1902년 젊은 엔지니어 윌리스 캐리어(Willis Carrier)가 해결하려던 것은 뉴욕 브루클린의 한 인쇄공장이 겪던 문제였다. 여름철 습도가 변할 때마다 종이가 늘어나거나 줄어 컬러 인쇄가 어긋났다. 캐리어는 공기를 냉각해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장치를 개발했다. 현대적 에어컨의 출발이었다.

산업공정을 위해 개발된 기술은 곧 생활공간으로 퍼져나갔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시원한 영화관이 한여름에도 관객을 끌어모으면서 에어컨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어컨은 한 나라의 경제지리까지 바꾸었다. 20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에어컨 보급과 함께 인구와 경제활동이 북동부와 중서부에서 남부의 '선벨트(Sunbelt)'로 크게 이동했다. 물론 미국 남부의 성장을 에어컨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자동차와 고속도로, 값싼 토지와 주택, 기업과 산업의 이동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그러나 에어컨이 고온다습한 기후가 주거와 생산에 부과하던 비용을 크게 낮춘 것은 분명하다.

중동 걸프 지역의 발전도 냉방기술 없이 생각하기 어렵다. 두바이와 아부다비 같은 사막 도시에서 초고층 빌딩과 쇼핑몰, 사무실과 데이터센터가 한여름에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대규모 냉방시스템 덕분이다. 풍부한 석유와 가스, 대규모 건설투자가 도시 발전을 이끌었지만, 무더위 속에서도 대도시가 연중 기능하게 한 냉방 인프라도 중요한 기반이었다.

에어컨은 사람의 생명도 구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에어컨은 65세 이상 인구의 폭염 사망을 해마다 약 19만명 줄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냉방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생산기술이자 생명을 보호하는 기후적응 기술이다.

물론 에어컨에도 대가가 따른다. 실내의 열을 밖으로 내보내 밀집된 도시에서는 주변 기온을 높일 수 있고, 무엇보다 많은 전력을 소비한다. 현재 냉방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약 4%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냉방 수요가 급증하면 이 부담도 커질 것이다.

그러나 에어컨을 포기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폭염 속에서 냉방은 노인과 취약계층에게 생존의 문제이자 경제활동을 위한 필수 기반이다. 필요한 것은 더 나은 기술로 부작용을 줄이는 것이다.

이미 변화가 시작됐다. 에너지효율이 높은 냉방기기와 친환경 냉매, 지역냉방, 인공지능을 활용한 에너지 관리 등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제습과 냉각을 분리해 에너지 소비를 크게 줄이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인류의 경제발전은 자연의 제약을 그대로 받아들여 온 역사가 아니다. 추운 지역에서는 난방기술이, 건조한 지역에서는 관개기술이 인간의 활동 범위를 넓혔다. 철도와 자동차는 거리의 제약을 줄였고 전기와 조명은 밤이라는 시간의 제약을 완화했다. 에어컨도 마찬가지다. 더위를 없애지는 못했지만 인간의 건강과 생산성, 도시 발전을 가로막는 제약을 크게 줄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제약은 기후만이 아니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노동력이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미래를 미리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어컨이 기후의 제약을 완화해 열대와 사막에서도 현대적인 도시와 경제활동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듯이, 로봇과 인공지능은 노동력 감소라는 인구학적 제약을 완화할 수 있다.

미래의 조건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조건에 어떻게 적응하고 어떤 기술을 만들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에어컨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석좌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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