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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길목에 서 있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월 출간된 책 '슈퍼 모멘텀'에서 한 말이다. 최근 약진하고 있는 HBM 스토리의 핵심은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그가 내놓은 답이었다.
SK가 그 길목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6년 실리콘 관통 전극(TSV) 선행 연구로 시작해 2013년 세계 최초 HBM 출시까지, 7년의 개발 끝에 얻은 반도체는 정작 시장에서 팔리지 않았다. 2세대 HBM에서는 오히려 삼성전자에 밀렸다.
세계 최초 기술로 칩을 만들었으나 오히려 경쟁자에게 밀려나고 적자가 누적되던 SK하이닉스의 좌절감은 2019년에는 정점에 이르렀다. 심대용 당시 임원의 회고는 이랬다. "골칫거리였다. 쓸모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회사 내부에서 개발 중단이 논의됐다. 그러나 당장은 골칫거리이며 애물이기는 해도 HBM이 미래 기술의 길목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다. 이를 인지하고 있던 SK하이닉스 경영진은 오히려 이천 패키징 시설에 8800억원을 추가 투입했다.
같은 때 삼성전자에도 HBM은 돈만 먹는 하마였다. 그들은 SK와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HBM은 수요가 크지 않고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삼성전자는 골칫거리 개발팀을 아예 해체했다.
◇갈라진 두 회사의 30년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은 2025년 1분기, 반도체 업계에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SK하이닉스가 D램 시장 점유율에서 30년간 1위를 지켜온 삼성전자를 처음으로 제친 것이다. 이 역전의 일등공신이 바로 HBM이다. 골칫거리였던 애물이 인공지능의 부상과 함께 화려한 부활을 한 것이다.
2026년 1분기 세계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 58%, 삼성전자 21%, 마이크론 21%다. 삼성전자는 2024년 뒤늦게 HBM 개발팀을 다시 신설하고 추격에 나섰지만 때를 놓치고 말았다. 이미 시장은 SK가 지배하고 있었다.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2019년 삼성이 HBM 팀을 해체한 그해부터 오늘까지 약 20배 뛰었다. 그리고 지난 6월 코스피 시가총액 1위 자리를 26년 만에 삼성전자로부터 빼앗았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안목
외국인들이 SK하이닉스가 엄청난 적자를 보면서도 추가 투자를 이어가 시장을 장악한 이야기를 들으면 놀란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수장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혜안이 아니다. 미래를 내다본 것이 아니라, 기술 발달의 길목에 좌판을 깔아놓은 안목이었다. 혜안은 미래를 아는 것이다. 안목은 지금의 길목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안목의 진짜 시험대는 처음 좌판을 깔 때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수요가 없을 때에도 그 좌판을 접지 않는 결단이다.
◇오늘의 D램은 무엇인가
그러면 오늘 한국은 AI 산업의 어디에 좌판을 깔고 있는가.
지금 한국의 대기업과 정부가 대대적으로 밀고 있는 것은 소버린 AI다. 국가가 자체 AI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는 명제 아래 데이터센터, GPU, 국산 파운데이션 모델에 대규모 투자가 진행 중이다. 이 투자에는 뚜렷한 논리가 있다. 눈에 보이는 시장 수요가 있고, 이미 검증된 기술 경로가 있고, 안정적 수익 모델도 있다. 정치적 명분과 산업 논리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안전한 좌판이다. 소버린 AI는 명백히 시장이 눈에 보이는 기술이다.
◇다음 좌판은 어디에 깔 것인가
그러면 오늘의 HBM은 무엇인가. 7년 전 삼성전자가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해 접었던, 눈에 보이는 시장이 없는 그런 길목 말이다.
지난 회에서 우리는 그 답의 하나를 이야기했다. 슈퍼 에이전트. 여러 AI 에이전트가 각자 움직이는 세상에서 그들을 조율하고 신원과 의도를 확인하는 상위 층의 AI다. 그런데 정확히 7년 전 HBM처럼, 이 기술은 아직 눈에 보이는 시장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OpenAI·구글·앤스로픽이 그 필요성을 인정했고, 힌튼과 300명의 세계 최고 지성이 2026년 말까지 국제 합의를 요청했으나 눈에 보이는 수요는 아직 없다.
그러나 에이전트 경제가 열리는 순간, 슈퍼 에이전트는 그 경제의 모든 거래가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된다. 그 길목에 지금 좌판을 까는 회사가 다음 시대의 SK하이닉스가 될 것이다.
HBM이 AI 하드웨어의 필수 인프라라면, 슈퍼 에이전트는 AI 에이전트 시대의 최종 안전판이다.
◇한국은 다음 좌판을 알아볼 것인가
2019년, 삼성과 SK는 앞에 놓인 애물을 SK만 접지 않았다. 오늘 소버린 AI라는 눈에 보이는 좌판에 집중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길목을 놓치는 것은 아닌가. 이 물음의 답은 정부의 정책도, 대기업의 결정도, 학계의 진단도 아니다. 그것은 오늘 이 길목의 좌판을 지키는 자가 내일의 SK하이닉스가 된다는 사실 하나다.
이영환 (크레페 펀드 대표이사)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