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허쉬만 리슨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가상 인물·인터랙티브 영상·AI로 기술이 바꾸는 정체성 탐구
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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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허쉬만 리슨의 '로나'. /서울시립미술관
TV를 향해 총을 쏘는 여성, 관람객의 선택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가상 인물, 인간과 대화하며 감정을 주고받는 인공지능(AI). 낯선 장면 같지만 오늘날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 온라인에서 여러 자아를 오가고 AI와 관계를 맺는 시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60여 년간 예술로 파고든 작가가 있다. '미디어아트 선구자'로 꼽히는 미국 작가 린 허쉬만 리슨(85)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린 허쉬만 리슨: 나의 [나]들'은 리슨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는 회화, 사진, 조각, 영상, 미디어 설치 등 200여 점을 통해 기술이 인간의 몸과 감정, 정체성을 어떻게 바꾸는지 살핀다. 비디오와 인터넷에서 AI, 유전공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술을 작업에 끌어들여 온 리슨의 실험을 따라가다 보면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대표작 '로나'(1979∼1984)는 광장공포증으로 전화와 TV를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가상 인물을 내세운다. 관람객은 리모컨으로 로나의 행동을 선택하고 선택에 따라 이야기는 서로 다른 결말로 이어진다. TV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도 나온다. 스크린은 세상과 연결하는 통로인 동시에 사람을 고립시키는 장치일 수 있다는 질문이다. 관람객이 이야기의 전개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은 오늘날 인터랙티브 콘텐츠와 게임을 떠올리게 하지만, 작품의 초점은 선택의 재미보다 미디어가 인간의 경험과 행동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있다.
틸리, 텔레로보틱 인형〉(1995)과 〈사이버로베르타〉(1996_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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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 텔레로보틱 인형'(1995)과 '사이버로베르타'(1996~2026)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리슨은 가상의 인물을 현실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1973∼1978년 진행한 '로베르타 브라이트모어' 프로젝트에서 가상의 여성 로베르타를 만들어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 운전면허를 취득했으며, 신문에 룸메이트 광고를 냈다. 허구의 인물이 현실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지 실험한 것이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시선은 초기 AI 작업에서도 드러난다. '에이전트 루비'(1998∼2002)는 사용자와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형성하는 초기 AI 챗봇이다. 대화가 쌓일수록 가상의 인물이 만들어지고 사용자는 기계에 감정적 친밀감을 느낀다. AI와 대화하며 위로를 얻는 오늘날의 풍경을 앞서 포착한 셈이다. 신체에 카메라와 TV 등의 이미지를 결합한 '팬텀 림' 시리즈는 여성의 몸이 미디어의 시선과 감시 대상이 되는 현실을 짚는다. 유전공학을 다룬 '무한 동력' 프로젝트는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이 생물학적 조건마저 바꿀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한다. 몸과 정체성이 더 이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기술에 따라 변형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로나'와 '딥 컨택트', '에이전트 루비' 등 관람객 참여형 작품 3점은 이번 전시에서 한국어로 처음 공개된다. 작가의 장편영화 3편을 소개하는 영화 프로그램 '새롭게 발견된 여성들'도 11월부터 내년 1월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AI와 디지털 기술이 일상과 관계, 정체성의 의미를 바꾸고 있는 오늘날, 린 허쉬만 리슨의 작품은 '나는 누구이고,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마주하게 한다"며 "이번 전시가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성찰하고, 우리 각자의 다양한 자아와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2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