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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긍정 진행 중’ 전 국가대표 여자농구 센터 김영희 씨의 희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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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배 기자

승인 : 2014. 01. 01. 10:02

** “거인병으로 한때 극단적 생각… 이제는 베푸는 한 착한 사람으로 기억 남고파”
김영희 씨가 25일 박정배 기자 jayman1@

아시아투데이 박정배 기자 = “매년 저는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어요.”

1984년 한국 농구 사상 올림픽 첫 메달의 핵심멤버였던 전 국가대표 김영희 씨(50). 8평 남짓한 다세대 주택에서 그는 만성 말단비대증(일명 거인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매년 희망으로 새 삶을 쓰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는 약이 없으면 하루조차 넘기기 힘든 무거운 몸을 이끌면서 가톨릭대학교 의대 강의에 나서 ‘용기의 힘’을 보여줄 예정이다.

김씨의 생활은 ‘희망 현재진행형’이다. 타인에 비해 지나치게 큰 키, 아픈 무릎으로 인해 스스로 계단, 비탈길을 오르내리지 못하는 불편함, 한 달 40만원의 생활보조금과 부업을 통한 소액벌이도 그의 긍정적인 삶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김씨는 지난달 30일 자택에서 아시아투데이와 장시간 인터뷰를 가졌다. 오랜만에 손님이 왔다는 기쁨에 그는 시종일관 즐거운 모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었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인터뷰에 앞서 “나를 이렇게 만든 거인병의 원인을 밝히고, 이를 치료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그는 “거인병으로 인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고, 오로지 운동을 위한 삶을 살았다”며 “남은 것은 없지만 후회도 없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병마로 인해 비극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가난한 집안을 살리고자 시작했던 운동. 다른 선수들에 비해 월등한 신체조건을 가졌고, 한때 성공가도를 달렸다. 가족을 위해, 팀을 위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펼쳤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을 고난으로 빠지게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김씨의 키는 이미 180㎝에 달했다. 그때부터 거인병 증세가 나타난 셈이다. 

하지만 당시는 거인병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 없던 시절. 키가 크다는 이유로 학교 배구팀에 영입돼 운동선수 인생을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실업 배구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월급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흔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모 잡지에서 김씨의 훈련 모습을 게재했고 이를 본 부산 동주여상(현 동주여고) 감독이 다시 그를 데려가고 말았다. 당시 동주여상과 연고를 맺은 한국화장품은 김씨를 농구 명문 서울 숭의여고에 입학시켰다. 본격적인 농구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김씨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점보시리즈에서 한 경기 52득점을 올려 신기록을 세웠고, 인기상, 득점상, 리바운드상, 자유투상, 최우수선수상을 석권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성적지상주의로 인한 한 선수의 일방적인 희생이 도사리고 있었다. 고교 시절부터 김씨는 내내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뇌하수체에서 과도한 남성호르몬이 흘러 모든 장기가 커졌다. 극심한 두통에 밤새 눈물을 흘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 감독님에게 훈련 및 경기를 빼달라고 사정했지만 어린 선수의 꾀병으로 받아들여졌다”며 “오히려 사우나에 들어가고 몇 시간씩 러닝을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극심한 고통은 오로지 진통제로 해소했다. 김씨는 “경기에 나서기 전에 독한 진통제를 먹었다”며 “경기에 뛸 때는 고통을 잊었지만 늘 밤만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월등한 신장을 보유했지만 스피드가 느렸던 김씨는 LA올림픽에서 여자농구대표팀이 은메달을 획득할 당시 벤치를 지켰다. 하지만 이후 절치부심 노력하며 1988 서울올림픽을 준비했다. 하지만 뇌종양 판정을 받으며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수술실에 들어가려는데 간호사가 기쁜 소식이 왔다고 전했다”며 “신문에 ‘김영희, 점보시리즈 1000득점 돌파’라고 보도됐다”고 했다. 병원에서도 농구공을 손에 놓지 않으며 재기 의지를 이어갔지만 끝내 선수 생활을 접어야만 했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방광암 판정을 받았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뇌출혈로 1998년 세상을 떠났다. 이어 2000년 아버지도 떠났다.

농구를 하며 벌어놓은 돈을 모두 부모님 치료비로 썼지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특히 선수생활을 접은 뒤 유일한 친구였던 어머니가 떠나며 김씨는 삶의 목적을 잃었다.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집안에 틀어박혔다. 체중이 70㎏까지 떨어졌다. 사실상 뼈만 남은 셈이다. 극적으로 남동생 부부가 발견해 병원에 실려 갔다. 1주일만 지났으면 사망했을 것이라고 했다.”

남동생이 삶의 의지를 되살렸다. 김씨는 “올케가 울면서 ‘언니만 바라보는 남편을 생각하면 언니가 이러면 안 된다’고 통사정을 했다”며 “그때 평소에 어머니가 해준 말이 떠오르며 정신을 차리게 됐다”고 전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영희야, 네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라. 그러면 사람들도 널 받아줄 거야”라고 늘 충고해왔다. 소박한 삶의 진리였지만 김씨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이후 그의 삶은 달라졌다.

“동네 꼬마들이 ‘거인, 나와라’라며 늘 놀리곤 했다. 너무 창피해서 숨기만 했다. 어른들도 슬금슬금 피하기만 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밖으로 나왔다. 나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농구선수 시절 이야기도 해주고, 불우한 이웃들에게 음식도 베푸니 모두가 나의 친구가 돼줬다.”

스스로 세상에 다시 나오니 김씨를 위한 자리는 많았다. 250만원짜리 성장억제주사를 병원에서 지원해준다.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에서 경기위원으로 위촉했다. 틈틈이 농구를 관람하러 춘천, 구리를 오간다. 올림픽 메달 연금 20만원과 생활보호대상자 지원금 20만원, 그리고 부업으로 버는 돈으로 생활하지만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면서 산다.

그는 “사람들은 큰 키로 인해 삶이 불행해졌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감사하다”며 “덕분에 전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며 남들이 못 보는 것, 못 먹는 것 마음껏 누려봤고, 우승을 통해 자아실현도 이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것 모두 남들과 나누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소박한 꿈이고, 늦게라도 삶의 즐거움을 찾아 행복하다”는 소감을 전했다.
박정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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