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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108주기] “안중근 의사를 장군으로 불러야”

[안중근 108주기] “안중근 의사를 장군으로 불러야”

기사승인 2018. 03.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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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단체·일부 정치권 중심 호칭 변경 움직임 활발
유토피아추모관 내 추모비, 대장 상징 별 4개로 만들어
안중근
경기 안성시 유토피아추모관에 있는 안중근 장군 추모비./제공=유토피아 추모관
26일 순국 108주년을 맞는 안중근 의사를 장군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 당시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으로 활약했다.

‘안중근 장군’ 호칭 움직임은 관련 사회단체 및 정치권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안중근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 단체 등은 2010년 추모사업과 연계해 국회의원 150여명의 동의를 받아 안중근 장군으로 부르기 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대장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한 바 있다.

이와 관련, 우원기 안중근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 자문위원 겸 유토피아추모관 회장은 20일 “안중근 장군의 호칭은 이미 18대 국회에서 152명의 국회의원이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 일계급 특진 서명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으로 남았다”며 “이를 반영해 유토피아추모관에 건립된 안중근 장군 추모비에 군의 대장을 상징하는 별 4개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경기 안성시 유토피아추모관 내 안중근 장군 추모비는 장군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우 회장이 건립을 추진, 2015년 4월30일 제막됐다.

독립운동 사료에 따르면 1879년 9월2일(음력 7월16일) 황해도 해주 광석동에서 태어난 안중근 장군은 할아버지 안인수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틈이 나는 대로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청계동의 수려한 산세를 무대로 전쟁놀이를 즐겼다. 또, 집안에서는 사냥과 활쏘기, 말타기 등을 배워 15, 16세 무렵에 발군의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안 장군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에 맞서 곳곳에서 승전고를 울렸다. 안 장군은 1908년 6월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해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고 진지를 점령해 일본군을 완전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만, 안 장군은 만국공법에 따라 사로잡힌 적병(포로)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 아래 부대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로들을 석방했다. 의병활동으로 펼친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안 장군은 승리를 거듭했지만,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였던 일본군들을 풀어주면서 일본군의 역추격을 받아 패퇴했다.

12인 동의단지회 일원이었던 안 장군은 현재 러시아 땅인 연추(현 크라스키노)에서 왼손 약지 첫 관절을 끊고, 태극기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고 쓴 뒤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쳤다. 안 장군은 일본에 붙잡힌 뒤 옥고를 치르는 동안 동의단지회의 11인의 명단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안 장군은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암살했다. 이후 안 장군은 1909년 10월26일 재판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에 대해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등 15가지 죄목을 들었다.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를 받은 안 장군은 최후 법정진술에서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혔다. 안 장군은 이 자리에서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독립 전쟁 중에 적장(이토 히로부미)을 사살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토피아추모관 관계자는 “국가와 군을 대표하는 장군 존칭이 개인 자격인 의사보다 의거의 취지를 더 정확히 담고 있는 것”이라며 “안중근 장군 호칭의 공식화를 위해 계속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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