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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 ②] ‘민주화 상징’ 아웅산 수 치는 왜 로힝야에 침묵하나

[로힝야 ②] ‘민주화 상징’ 아웅산 수 치는 왜 로힝야에 침묵하나

기사승인 2020. 12. 1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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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로힝야족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인종청소의 사례’라고 정의할 정도로 가혹한 처우를 겪은 소수민족입니다. 미얀마어를 로마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Rohingya’가 국제사회에는 ‘로힝야’로 알려졌지만 미얀마 현지 발음은 ‘로힌자’에 가깝습니다. 우리 언론에도 로힝야족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로힌자 혹은 로힝야라는 종족 명칭도 자신들이 부여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도 135개 종족으로 구성된 미얀마 국민에 속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름마저 잘못 알려진 불운한 종족. <우리가 못 본 아시아>란 기획으로 아시아의 소외당한 소수민족들의 삶을 살펴볼 아시아투데이가 그 첫 번째로 미얀마의 로힝야족을 조명합니다>

아시아투데이 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 1년 전 이맘때,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ICJ) 법정에는 당시 아웅 산 수 치 미얀마 국가고문 겸 외교부 장관이 섰다.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그녀는 법정에서 로힝야족 집단학살 혐의를 부인했다. 애초에 미얀마 군부가 제소 당했기에 수 치 본인이 직접 설 필요도 없던 자리였으나 직접 변호인단을 이끈 그는 그 자리에서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행위를 변호하고 나섰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수십만이 난민으로 떠돌고 있는 사건을 외면한 그에게 “아웅 산 수 치의 몰락(CNN)”·“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이던 그가 야만성의 변호인이 됐다(뉴욕타임스)”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이후 인권단체인 국제 앰네스티는 그에게 부여했던 ‘양심 대사’를 철회했고, 한국의 5·18 기념재단과 영국 에딘버러시도 각각 그에게 수여했던 광주인권상과 에딘버러 인권상을 박탈했다. 1991년 그에게 수여된 노벨 평화상도 박탈해야 한다는 비판까지 일고 있지만 로힝야 문제에 대한 수 치 국가고문의 태도는 현재도 변함없다. 오히려 “정치에서 비판은 평범한 일이다. 나는 지난 30여 년 간 군사정권으로부터 아주 심한 비판을 받아왔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왜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꿈쩍않는 것일까

◇미얀마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로힝야’
미얀마는 자국 영토내 135개 민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에는 136번째 민족이 있다. 바로 로힝야족이다. 미얀마 정부와 주요 인사들은 줄곧 ‘로힝야’라는 단어의 언급 자체를 피해왔다. 수 치 국가고문은 ‘로힝야’라는 단어를 쓴 미국 대사에게 “우리는 그들(로힝야족)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로 부르지 않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이란 단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고, 이들을 ‘라카인 무슬림’, 벵골인, 치타공인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대부분의 미얀마인이 몽골계인데 반해 이들은 벵골인이다. 게다가 불교가 국교처럼 자리잡고 있는 미얀마에서 이들은 소수종교인 이슬람을 믿는다.

로힝야족이 언제부터 미얀마에 살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선 몇 가지 설과 주장이 갈린다. 8세기부터 라카인주에 거주했다는 주장과 19세기 영국의 식민통치와 함께 미얀마에 대거 유입된 벵골인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어쨌든 19세기 미얀마에 진출한 영국은 부족한 노동력을 충원하고자 벵골인을 대거 이주시켰다. 영국은 이들이 원주민인 버마족보다 ‘순종적’이라 여겨 호의적으로 대했고, 이들도 다른 소수민족들처럼 식민당국에 협력했다. 8세기부터 살아왔든, 19세기에 유입되었든 현지 불교도들과는 자연스럽게 ‘구별’이 됐다.

로힝야족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주민이던 버마족이나 일본과 심각하게 대립했고, 같은 이슬람과 벵갈계인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에 라카인주의 합병을 두 차례나 건의해 큰 반감을 불러 일으키도 했다. 이후 1962년 집권한 1차 군사 정권의 수장을 맡았던 네윈은 인도인을 경멸했고, 문화적으로 인도와 가까운 벵갈계도 탄압의 대상이 됐다. 버마족과 불교를 중심으로 미얀마 사회 구조가 재편됐고, 독립과 분리를 주장하는 세력에 대한 군사 작전 등이 진행되며 1974~77년 30만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떠났다. 1982년의 시민법에서도 로힝야족은 미얀마의 세 종류의 시민(완전시민·준시민·귀화시민)에 포함되지 않았다. 로힝야족은 법적으로 ‘무국적자’다. 1988년 집권한 신군부는 버마족과 불교에 이어 미얀마어를 국민통합의 기제로 삼았고 미얀마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소수종족은 사실상 ‘외국인’처럼 여겨졌다.

2015년 총선에서 아웅 산 수 치가 이끄는 NLD가 승리하며 군부 통치가 종식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2017년에는 로힝야족과 미얀마군 사이의 충돌이 발생, 미얀마군의 토벌작전으로 수천 명의 로힝야족이 사망하고 75만 명의 로힝야 난민이 방글라데시와 인도네시아 등으로 쫓겨나 떠돌고 있다.

◇아직은 불안한 아웅산 수 치의 정치기반…‘국민’ 마음 잡으려 선택한 ‘배제’
수 치 국가고문이 로힝야 탄압을 눈 감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불안한 정치 기반이다.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권을 되찾으려 하는 미얀마 군부다. 수 치 국가고문으로서는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미얀마의 ‘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라도 전체 인구의 90%에 달하는 불교도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아무리 민주주의와 인권 운동의 상징이더라도 ‘민심’에 반해 로힝야족을 옹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선은 아웅 산 수 치와 민간정부가 군부를 견제할 충분한 역량을 갖춘다면 미얀마의 당면과제와 함께 로힝야 문제도 해결될 것이란 기대도 있다.

그러나 수 치 국가고문이 정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군부를 배제한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수십만 로힝야족의 생존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문제다. 정권이 안정되면 로힝야족의 문제가 해결되리란 보장도 없다. 지난 11월 초 미얀마 총선에서 수 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NLD가 압승을 거뒀지만, 이달 4일 방글라데시의 로힝야족 난민 1600명은 외딴 섬으로 강제 이주됐다. 로힝야족 이슈의 근간에는 영국의 식민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 이슬람교도와 불교도라는 역사·종교 문제가 깔려있지만 그것이 과연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로힝야족에 대한 박해와 심각한 인권침해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국제사회와 수많은 인권단체들이 이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되새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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