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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의 자연 에세이] 충만과 공허의 가을 풍광

[이효성의 자연 에세이] 충만과 공허의 가을 풍광

기사승인 2021. 10. 2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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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주필
이효성의 자연 에세이 최종 컷
봄에 생명을 얻은 것이 여름에 성장하고 가을에 성숙한다. 그리하여 여름과 초가을까지 세상은 생명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한가을에 이르면 생명체의 상당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겨울에 대비해야 한다. 동물들은 추위로부터 안전한 은신처로 숨거나 두꺼운 솜털로 무장하거나 따뜻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활엽수는 잎과 익은 열매를 떨구고 헐벗은 채, 풀은 잎을 말리고 씨앗이나 뿌리로, 겨울을 난다. 그리고 작물의 경우는 수확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을은 생명과 그 환경의 모습이 급격히 바뀌는 철이다.

벼를 비롯하여 조, 수수, 콩, 고구마, 사과, 배, 감 등 가을에 익는 주요 작물, 또는 흔히 오곡백과로 표현되는 곡식과 과일은 여름에 무럭무럭 자라 초가을의 따가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 속에서 여물고 익는다. 그런데 한국은 벼농사가 주이기에 가을 들녘은 익어갈수록 점점 더 노랗게 변색한 벼들로 가득하다. 그리하여 온 들녘에 익어가는 벼들이 산들바람에 출렁거리며 만드는 황금물결은 장관을 이룬다. 이는 한국의 전형적인 가을 풍광이기도 하다.

이처럼 벼를 포함하여 익어가는 오곡백과는 장관을 연출할 뿐만 아니라 가을 들녘을 가득 메우고 있어 충만감을 준다. 더구나 이들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소중한 먹을거리를 잔뜩 매달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을 바라만 보아도 풍요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는 또 땅이 주는 자양분 그리고 하늘이 베푸는 햇볕과 비바람에 인간의 수고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소박하고 정직한 결실이기에 감사하는 경건한 마음도 일게 한다. 그것들은 조만간 수확되어 곳간을 채우고 추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는 식량이 되어 줄 것이다.

이들 작물들은 시월 중에 익을 대로 다 익어 있어 거두게 된다. 만일 추수가 너무 늦어져 작물들이 서리를 맞게 되면, 수확물은 맛도 떨어지고 상하기도 쉽다. 물론 서리가 내린 뒤에 수확한다고 해서 서리태라고도 부르는 검은 콩이라는 예외가 있지만, 그 외에는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을 마쳐야 제대로 먹을 수 있다. 그러려면 곡식이든 과일이든 늦어도 시월 중순까지는 추수를 마쳐야 한다. 그리하여 시월은 오곡백과를 거두는 바쁘지만 풍성하고 기쁨을 주는 추수의 철이기도 하다.

그런데 추수를 마치고 나면 들판은 휑하니 색깔이 사라진 무채색의 빈 공간이 되고 만다. 특히 가득하던 샛노란 벼들이 거두어진 논은 참으로 허전하다. 수수와 조가 사라진 밭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추수를 마친 들녘은 그 풍광과 그에 대한 우리의 정조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익은 곡식으로 아름답고 풍성하던 황금빛 들녘은 추수로 인해 어느덧 텅 비어 우리에게 공허함과 쓸쓸함을 안겨주는 곳으로 변한다.

황금빛 물결로 출렁이던 들녘이 어느 순간에 텅 빈 공허로 변해버리는 이 급작스러운 반전에서 사람들은 우수와 비애를 느끼게 된다. 본래 가을은 우수와 비애를 일으키는 계절이다. 고도가 낮아지며 약해지는 햇볕, 짧아지는 낮의 길이, 건조하고 서늘한 바람, 그 바람에 이울어가는 풀, 생명력이 넘치던 녹색이 사라지는 나뭇잎, 물가나 언덕에서 한들거리는 갈대나 억새, 가냘픈 풀벌레 울음소리 등도 우수와 비애를 일으키는 물상들일 것이다. 그러나 추수가 끝난 텅 빈 들녘이야말로 가을의 우수와 비애를 일으키는 주된 까닭이 아닐까.

시월이 지나 활엽수의 나뭇잎들이 죄다 조락하면 나무는 헐벗게 되고 숲도 텅 비게 된다. 그리고 낙엽들이 쌓여서 찬 갈바람에 여기저기 휩쓸려 다니다가 종래에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 모습에 누군들 비애와 우수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소멸에서 오는 공허는 우수와 비애의 근원이다. 추수 후 텅 빈 들녘 그리고 조락 후 헐벗은 나무와 휑한 숲이야말로 우수와 비애의 근원이다. 가을은 들녘에 가득한 잘 익은 오곡백과로 충만의 기쁨을 주는 한편, 추수와 조락에 따른 소멸은 공허의 슬픔을 주는 상반된 정서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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