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마다 '야성' 발휘로 돌파
국내 넘어 글로벌 IB·운용사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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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국내 자본시장에서 최초의 기록을 쓴 인물이다. 정확한 판단과 거침없는 실행력으로 성공신화를 이뤘다. 그가 직면한 위기도 만만치 않았다. ‘야성’은 실패를 마주할 때마다 그가 재도약하는 주춧돌이 돼 왔다. 필요할 때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박 회장의 오랜 꿈을 이뤄가고 있다.
◇“왜 야성을 고집하는가”
미래에셋증권은 지난해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업계 1위 수준이다. 후발주자였던 미래에셋증권이 자기자본뿐만 아니라 영업이익 규모도 업계 1위로 키워낸 것은 박 회장의 역할이 컸다.
자수성가 ‘증권맨’이던 박 회장은 돌연 사표를 내고 1997년 미래에셋벤처캐피탈(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투자자문(미래에셋자산운용)을 차렸다. 이듬해에는 국내 최초의 뮤추얼 펀드인 ‘박현주 1호’ 펀드를 선보였는데 1년 만에 수익률 90%라는 대기록을 내며 ‘전설’로 남았다 .
1호의 성공에 힘입어 1999년 야심차게 출시한 ‘박현주 2호’는 기대에 못 미쳤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벤처 거품이 꺼지고 주가가 가파르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1999년 1028.07포인트로 마감한 코스피는 2000년 504.62포인트로 내려앉았다.
그때 박 회장이 내린 선택은 해외 진출이었다. 미래에셋은 국내 자산운용사 중 처음으로 해외 진출을 선언했다. 2003년 홍콩에 해외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2000년대 초반 국내 금융회사들은 해외 진출에 소극적이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지만 박 회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국내 첫 해외법인 운용 펀드인 ‘아시아퍼시픽스타펀드’도 출시했다. 한 달 만에 2000억원 넘게 자금이 몰렸다.
미래에셋을 국내 최고 자산운용사로 키워낸 박 회장은 2007년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인사이트 펀드’를 선보였다. 당시 펀드 중 가장 높은 운용보수를 책정했다. 그럼에도 출시 2주 만에 무려 4조원을 빨아들였다. ‘최단기간 최고액 판매’라는 기록도 세웠다.
◇‘야성’의 결실…‘금융 수출’ 현실화
기록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1년 만에 손실이 발생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수익률이 -60%대로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다시 플러스 수익으로 돌아서는 데는 7년이 걸렸다. ‘박현주=성공’이란 등식이 깨지는 듯했다 .
그러나 박 회장은 야성을 바탕으로 지치지 않는 저력을 발휘했다. 대우증권 인수 등을 거쳐 미래에셋증권을 국내 최대 증권사로 키워냈다. 이후 박 회장은 2018년 돌연 회장직을 내려놓고, 미래에셋대우 글로벌경영전략 고문을 맡았다. 해외 사업에 주력하겠다는 뜻이다. 미래에셋의 국내 사업은 전문경영인의 손에 맡겼다. 각 계열사에 부여한 자율성과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인물들의 결속력이 그룹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박 회장이 뚝심 있게 추진해온 ‘금융 수출’도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해 3분기 미래에셋자산운용의 해외법인이 거둔 누적 순이익은 2651억원으로 국내법인(2437억원) 순이익 규모를 앞질렀다. 해외법인은 운용자산(AUM) 증가에 따라 실적도 급증하고 있다. 미래에셋운용이 2018년 미국 상장지수펀드(ETF) 운용사 글로벌 엑스를 인수한 것도 성공사례로 손꼽힌다.
주목할 점은 2020년 미래에셋증권 해외법인 세전순이익이 처음으로 2000억원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증권업계 최초다. 2021년 순이익은 2400억원으로 2년 연속 2000억원대를 벌어들였다. 미래에셋증권은 자기자본 중 약 4조원가량을 해외에 투자하고 있다. 또 해외법인 11개, 사무소 3개 등 가장 많은 해외 네트워크를 보유한 증권사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각 해외법인별로 철저한 현지화를 통해 사업에 대한 역량을 집중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K-파이낸스의 경쟁력을 보여줄 것”이라며 “국내와 해외법인의 IB(투자은행) 역량을 강화해 브로커리지를 넘어 국내 기업의 해외진출 뿐 아니라 현지기업의 IPO(기업공개), IB 딜 수임 등 글로벌IB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