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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영 선언 나오기까지의 6개월
신경영 선언은 왜 나오게 된 것일까?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쓴 ‘경제사상가 이건희’를 살펴보면 이 회장은 1987년 회장 취임 후부터 변화와 개혁을 주문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답답해했다고 한다.
변화의 불씨는 1993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출장에서 시작됐다. 이 회장이 현지 가전매장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삼성전자 제품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 회장은 삼성 사장단 23명을 LA로 불러들여 돈 봉투를 나눠주고 백화점과 가전 매장에서 쇼핑을 하라고 지시한다. 미국에 와 어리둥절한 사장들은 미국 백화점과 가전매장을 다니며 삼성전자 제품이 처한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이 회장은 LA 모처에서 2월18일부터 나흘간 임원 회의를 주재하고 일본 도쿄로 날아간다. 그리고 3월4일 계열사 사장단 46명을 도쿄로 불러 모아 세계 전자 시장의 메카였던 아키하바라를 누비며 일본의 경쟁력을 연구하도록 지시한다. 국내로 돌아온 후엔 여러 강연 무대에 직접 오르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은둔의 경영자’이자 ‘프로 재택근무자’였던 이 회장이 대중 앞에 목소리를 내던 시기였다.
결정적 한 방은 일본인 후쿠다 고문과 기보 고문이 쓴 두 편의 보고서다. 삼성에는 일본에서 모셔온 기술, 경영, 디자인 고문이 적지 않게 근무했는데 이 회장은 이들을 극진히 모셨다. 당시만해도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일본인은 손가락질 받는 일이 허다했지만 삼성을 위해 와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인 고문들이 쓰는 문제점 분석 보고서, 최신 동향 보고서에 관심을 갖는 삼성 임직원은 드물었다. 이 회장은 삼성 직원들이 일본인 고문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역정을 냈다고 전해진다. 앞선 기술과 노하우, 디자인을 배우라고 모셔왔는데 제대로 따르는 이가 없어서다.
그 해 6월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후쿠다·기보 보고서에 대해 참모들과 토론한다. 두 보고서에는 삼성전자에 사실상 디자인, 품질 개선은 없다는 지적이 담겨있었다. 이 회장은 비행기에서 참모들에게 끊임없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지 묻다가 ‘(직원들이)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다소 철학적인 답을 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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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신경영 선언 발표까지 이 회장의 ‘그라데이션 분노’ 과정이다. 이 회장은 당시 오전부터 새벽 3~4시까지 200여 명의 삼성 사장단, 임원진 앞에서 강연했다. 경제, 사회, 철학, 전자 제품, 삼성 사업구조의 문제점, 인재 등에 대한 경영철학과 생각을 댐에서 물을 방류하듯 쏟아냈다고 한다.
신경영 선언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강렬한 문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무수히 많다.
‘냄비 속 개구리론’도 널리 알려진 이 회장의 비유다. 이 회장은 “우리가 맞을 경제 전쟁은 무력전과 다르다. 자기가 전쟁을 하고 있는지, 전쟁에 지고있는지도 모르면서 망해간다. 끓고 있는 냄비 속에 갇힌 개구리처럼 죽는 줄도 모르고 무기력하게 당할 수 있다는거다. 이 전쟁의 패자(敗者)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삼성전자는 3만 명이 만든 물건을 6000명이 하루 2만 번씩 고치고 다닌다. 쓸데없이 자원 낭비하고 페인트 낭비해 공기 나쁘게 하고 나쁜 물건 이미지를 갖고 한다. 이런 낭비적 집단은 이 세상에 없다. 암으로 치면 2기다. 기회를 놓치면 3기에 들어간다. 누구도 못 고친다. 자금과 기술자를 투입시켜 노력해야 회생시킬 수 있다”고 질타했다.
이 외에도 이 회장이 삼성 임원 200여 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불러모아 수 일 간 밤을 새워가며 강연한 경영철학과 생각은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그 분야도 인재 확보, 최고경영자 조건, 미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 등을 아우르는 세계의 주요국 간 경제 역학구도까지 폭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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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영 선언 후 29년 간 삼성전자는 품질과 디자인, 기술 트렌드 선도 면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글로벌 인터브랜드 순위는 코카콜라보다 높은 5위다. 지난해 기준 전 세계에서 삼성보다 가치있는 브랜드는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뿐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삼성전자를 압도하는 브랜드력을 갖춘 기업이 없다. 이 회장이 걱정했던 품질, 브랜드력, 디자인, 기술력 등에서 흠잡을 곳 없는 기업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물론 최근 불거진 ‘갤럭시S22’의 의도적 성능저하 논란, 5나노미터(㎚) 반도체 수율 저하 잡음 등은 신경영 선언을 떠올리게 한다.
내년 30주년에는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과 같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만의 경영철학을 들어볼 수 있을까. 이 부회장도 2015년 이후 삼성의 인사제도, 기업문화, 노동조합 등 여러 측면에서 변화를 꾀해왔다. 시스템 반도체 2030 세계 1등의 비전도 임직원과 공유했다.
삼성 안팎의 잡음은 이 부회장의 목소리가 내부 실행까지 완벽하게 이어졌다고 보긴 어려워 보인다. 삼성 인사팀은 관례대로 노사협의회와 임금협상을 마치려다 노조에 고소 당했다. 노조를 인정하겠다고 전국민 앞에 사과까지 했던 이 부회장 집 앞에서 노조가 농성까지 벌이고 있다. ‘프로’ 호칭과 복장 자율화 등은 안착했지만 삼성이 도입하고자 했던 실리콘 밸리식 업무 문화 정착은 아직 요원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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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도 부회장 시절까지 합쳐 거의 10년 간 목소리를 높여서 겨우 삼성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있었던 1993년 삼성은 출범 55주년이었다. 올해는 삼성그룹 출범 84주년, 삼성전자는 53주년이고 그 규모도 더욱 거대해졌다. 여기에 취업제한 논란, 사법리스크에 갇혀있는 이 부회장의 상황도 오너십을 발휘하기에 한계가 뚜렷해보인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지난해 8월 가석방됐다. 사면 결정 없이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 상 취업제한 규정에 따라 5년 간 경영 활동에 제약이 따른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삼성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면 사면 결정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져왔다. 삼성이 영위하는 반도체 사업 특성상 강력한 오너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의 핵심 캐시카우가 지난 10년 간 변함없다는 점도 문제다. 메모리반도체, 스마트폰, TV가 여전히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세계 1위 제품이다. 지난 10년간 새롭게 키워낸 세계 1위 품목은 없다. 이들 품목의 수성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변화나 도전에 소극적이었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이 때문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물론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영계에서 이 부회장의 특별사면을 청원하는 입장도 여러 번 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지난 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경제 6단체장 간담회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을 공개 요청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