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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24> 이촌향도의 상실감 ‘고향초’

[대중가요의 아리랑] <24> 이촌향도의 상실감 ‘고향초’

기사승인 2023. 01. 0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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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찔레꽃이 한잎 두잎 물 위에 날리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의 정든 사람 어디로 갔나/ 전해오던 흙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고향초'는 노랫말 그대로 정든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떠나가는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광복 후에도 민중은 사향(思鄕)과 망향(望鄕) 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이촌향도의 심화 때문이었다.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든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고향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상실과 서러움의 세월이었다. '고향초'의 정서를 계승한 1970년대의 노래가 바로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일 것이다.

일제의 수탈로 특히 곡창지대인 남쪽지역 농민들이 소작인으로 전락하며 호구지책을 찾아 무작정 대도시로 떠나거나 국경을 넘어 만주 유랑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식민지 경제의 모순으로 농촌 사회가 해체된 데 이어 토착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은 광복 후 격동기에도 지속되었다. '뽕을 따던 아가씨들이 서울로 가는' 풍경 묘사가 나온 배경이다.

'고향' 노래가 등장한다는 것은 삶이 그만큼 고단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한국 사람에게 '고향'처럼 정겨우면서도 가슴 아픈 단어는 없을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고향을 잃고 부평초처럼 떠돌았고,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진 6·25전쟁으로 또다시 고향을 등져야 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도 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 감정일지도 모른다.

대중가요 '고향초'는 고향에 대한 상실감과 비애감을 읊은 정지용 시인의 시 '고향'의 정서와 일맥상통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그렇다. 정든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고향은 고향답지가 않은 것이다. 나아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라는 고향의 시적 풍경은 산천은 변함이 없는데 사람은 가고 없는 노래 속 고향의 정경과 일치한다.

'고향초'(김다인 작사·박시춘 작곡)는 1952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가수 장세정의 노래로 발표되었다. 이 노래는 해방 직후 혼란기인 1948년에 KBS 최초의 전속가수인 송민도의 데뷔곡으로 나왔지만, 6·25전쟁의 포연이 멀어져갈 즈음 장세정이 취입해 더 큰 인기를 누렸다. '고향초'에 대한 작곡가의 각별한 애정이 노래를 거듭나게 한 것이다. 작사가 김다인은 월북시인 조명암의 필명이라고 한다. 노래 가사는 1940·1950년대 피폐한 농촌 현실과 이농 현상을 눈물겹도록 서정적인 표현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가수 장세정은 그 노랫말이 머금고 있는 애틋한 의미를 처연한 음색으로 전한 것이다. 가난한 농민들 삶의 애환과 정든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허허로운 고향의 풍경이 쓰린 먹물처럼 가슴을 적신다. 더구나 겨레의 전통 가락인 세 박자로 구성된 노래여서 대중적 전염성이 높았다.

'고향초' 노래는 참 애잔하다. 쉬운 노랫말 속에 이토록 정제된 비감(悲感)을 담을 수 있는 작사가의 고도한 문학성에 숙연해질 따름이다. 어떻게 보면 이 노래는 농촌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면서도 고향의 흙냄새에 대한 향수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평양이 낳은 가희(歌姬)'라는 별칭을 얻었던 장세정 또한 6·25전쟁으로 고향을 잃어버리고 말년에는 머나먼 타향 미국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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