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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43> 월남민의 상흔 ‘과거를 묻지 마세요’

[대중가요의 아리랑] <43> 월남민의 상흔 ‘과거를 묻지 마세요’

기사승인 2023. 06. 1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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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 아~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구름은 흘러가고 설움은 풀려/ 애달픈 가슴마다 햇빛이 솟아/ 고요한 저 성당에 종이 울린다/ 아~ 흘러간 추억마다 그립던 내 사랑아/ 얄궂은 운명이여 과거를 묻지 마세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는 동명의 영화 주제가였다.

남북 분단과 전쟁의 후유증이 파생시킨 시대의 아픔은 노래가 되고 영화가 되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는 한국전쟁 중에 월남민이 겪었던 고난과 상흔을 대변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은 인공치하에서의 어쩔 수 없었던 부역이 몹쓸 과거가 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남북의 이념 전쟁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주홍글씨를 새기고 과거로 인한 홍역을 앓게 했다.

월남민의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이 노래는 하루빨리 38선 장벽이 무너지고, 어둡고 괴로웠던 시절이 지나간 꽃피는 세상을 갈망했다. 또한 북녘 땅에도 애달픈 가슴마다 햇빛이 들고 평화로운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고대했다. 전쟁과 이데올로기가 심어놓은 적대의식을 버리고 월남민이란 과거를 따지지 말고 화합하여 함께 잘 살아보자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당대의 인기 배우인 황해와 문정숙 박노식이 출연한 1959년 개봉 영화의 내용 또한 6·25전쟁을 배경으로 했다. 월남(越南)한 청년이 본의 아니게 절도죄를 범하고 법정에 서게 되는데, 친구인 변호사의 열띤 변론으로 석방되고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과거를 잊고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이다. 영화 주제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부른 가수 나애심 또한 숱한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 다재다능한 연예인이었다.

노래를 작곡한 사람은 나애심(본명 전봉선)의 오빠인 전오승이다. 당시는 전후 서양문화의 급속한 유입으로 우리 가요에도 화성과 선율에 변화의 물결이 일렁이는 시절이었다. 젊은 작곡가 전오승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리듬에 주목했고 그렇게 만든 노래들을 누이인 나애심이 불러 인기를 누렸다. 나애심은 이국적인 마스크의 글래머 배우이자 허스키하면서도 시원스러운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다.

1950~1960년대 가요계를 풍미한 나애심(羅愛心)이란 예명은 '내 마음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빈대떡 신사'의 가수 한복남이 지어줬다고 한다. 당시 20대였던 나애심의 목소리는 양반집 서가에 얹어둔 백자 항아리보다는 초가집 부엌에 나뒹구는 막사발을 닮았다. 세련된 성음보다는 투박한 질감이 묻어있다. '백치 아다다'와 '미사의 종'도 그렇게 불렀다. '백치 아다다'에는 주연 배우로 출연도 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는 노래를 부른 가수 나애심과 작곡가 전오승 그리고 작사가 정성수 모두가 한국전쟁 중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다. 특히 전오승은 북에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약혼녀를 남겨두고 내려왔다가 끝내 고향에 가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포연이 자욱했던 전쟁이 끝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휴전선 장벽은 여전히 높고 남북이 서로 겨누고 있는 총구에는 아직도 살기가 서려있다.

분단의 아픔을 서로 묻고 평화의 종소리를 울릴 그날은 아직도 요원한 것인가. 노래의 히트와 더불어 한때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란 제목이 남녀의 불륜이나 여자의 어두운 과거를 비유하는 유행어로 회자하기도 했다. 차라리 과거를 지닌 어느 여인의 회한이었으면 좋겠다. 아픈 역사를 대변하는 겨레의 넋두리로 지금껏 남아있기에는 녹슨 철책선과 낡은 종소리가 너무 오래고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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