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 농경과 유목의 차이탓에 전쟁했다

기사승인 2024. 03. 0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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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조선 선비가 본 고려 거란 전쟁 조명
붙임1. 백두산 정계비(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한국국학진흥원이 '고려 거란 전쟁'을 조선 지식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웹진을 발행했다. 사진은 백두산 정계비. /한국국학진흥원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인기인 가운데 한국국학진흥원이 조선 지식인들이 고려에 가졌던 인식을 살펴본 '조선의 눈으로 고려를 보다'라는 주제의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3월호를 발행했다.

KBS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기존 사극 시청층뿐 아니라 젊은 세대의 높은 호응과 지지를 얻으며 고려 시대에 대한 호기심과 판타지를 촉발하고 있다.

담談 3월호 '윤관의 9성에 대한 조선 시대 지식인의 인식'에서 이정신 교수(한남대학교)는 고려 숙종과 예종 대에 활약한 문신 윤관(尹瓘, 1040∼1111)에 대한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평가를 담았다.

고려는 현종 대에 거란의 침략을 받은 이후부터 서북방면 진출은 포기하고 동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는데 예종 2년에 윤관은 별무반을 편성, 완안부 여진을 소탕하고 9성을 설치해 여진인을 내보내고 남도 주민을 이주시켜 완전히 고려 영토로 만들었다.

이로써 고려는 국왕 중심의 강력한 통치 질서 수립뿐 아니라 영토 확장을 통한 농경지 획득이라는 경제적인 효과를 가져왔으나 화평론을 내세운 고려 조정은 정벌 2년 만에 동북 9성을 반환한다.

하지만 고려가 9성에서 철수한 지 6년 만에 여진은 금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고려는 9성 반환이 실책이었음을 인식한다.

조선 후기에는 9성 위치에 대한 논의가 많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후부터 북방 영역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영토 의식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윤관은 영토 개척의 영웅이자 선구자로 지속해서 거론됐다.
붙임2. KBS 드라마 _고려 거란 전쟁_ 포스터(출처 KBS)
거란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감감찬과 양규 등은 조선에서도 추숭됐다. 사진은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포스터. /KBS
'고려와 거란 전쟁-정주와 유목의 충돌'에서 허인욱 교수(한남대학교)는 고려와 거란, 두 나라가 전쟁한 이유를 농경과 유목이라는 문화사적으로 풀어냈다.

농사하며 정착 생활을 하는 고려와 달리 거란은 계속 이동하며 가축을 키우는 유목 문화를 영위했고 이 차이는 상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간극을 초래했으며 결국 무력 충돌이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유목민의 생존에 문제가 발생하는 때는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기 힘든 겨울일 수 없는 겨울이며 유목민은 생존을 위해 초원 밖의 사람들에게 물물교환 둥 도움을 받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약탈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쟁과 관련한 '요사'의 기록에 거란은 출병은 음력 9월을 넘기지 않고 군사를 돌이키는 것은 12월을 넘기지 않도록 했는데 이는 생활시스템 속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 1019년 귀주대첩에서 비바람을 이용한 고려군의 공격에 거란군이 달아나자 이를 쫓아가 공격했다는 요사 기록으로 보면 고려 또한 기마병이 있었고, 농경민족인 고려가 거란군을 막기 위해 거란의 장점인 기마술을 수용해 습득했음을 보여준다.

고려 시대 거란과 전투에 공을 세웠던 이들은 조선 시대에도 추숭돼 여러 병란으로 사라진 평안도 선천군의 삼충사(三忠祠)를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세워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 유백부(庾伯符)를 모셨으며 강감찬은 태조대부터 여러 서원에서 배향하고 묘를 재정비했다.

웹진 담談 2024년 3월호는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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