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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59> 남진의 출세곡 ‘가슴 아프게’

[대중가요의 아리랑] <59> 남진의 출세곡 ‘가슴 아프게’

기사승인 2023. 10. 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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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 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 아득히 바다 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1966년 어느 봄날 작사가 정두수는 보슬비가 흩날리는 인천 연안부두를 사흘째 서성거렸다. 작곡가 박춘석이 부탁한 가수 남진이 부를 노랫말의 맥락을 도무지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릴없이 어느 대폿집에 들어가 술과 해장국을 시켜놓고 멍하니 앉았는데 '부웅~' 하는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술집 여주인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뱃고동 소리가 죽비처럼 뒤통수를 때렸다.

순간 막혔던 문맥이 뚫렸다. 바다와 나 사이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은 애꿎은 봄비가 아니었다. 당신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바로 바다였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정두수는 즉흥적으로 써 내려간 노래시를 바로 작곡가 박춘석에게 전화로 불러줬다고 한다. 정두수가 가요에 얽힌 얘기를 풀어낸 자신의 저서 '노래 따라 삼천리'에서 밝힌 히트곡 '가슴 아프게' 가사의 탄생 비화다.

남진의 출세곡인 '가슴 아프게'의 원래 제목은 '낙도 가는 연락선'이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낙도로 떠나가는 연락선을 바라보며 느낀 서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려한 멜로디와 대중성 있는 노랫말에 비해 제목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명사로 끝나는 대다수 노래 제목과는 달리 부사형의 '가슴 아프게'란 파격적인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대중가요평론가 유차영의 전언이다.

'가슴 아프게'는 파란의 연속이었던 현대사의 질곡 속에 켜켜이 쌓인 민중의 아픔과 울분을 분출시키는 해원굿 역할을 했다. 한국인의 애틋한 정한을 머금은 선율과 가사가 국내는 물론이고 바다 건너 일본 열도까지 뜨겁게 달궜다. 재일동포들에게 바다와 부두 그리고 연락선과 갈매기가 등장하는 노래야말로 이별의 서러움과 함께 고국에 대한 사무치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망향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지평은 "'가슴 아프게'는 한국인의 애타는 가슴을 어루만져 준 '노래 약' 같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대중가요의 치유 기능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 한국인은 가슴을 치며 가슴에 묻고 가슴을 쓸며 살아온 민족이다. 오랜 시련의 역사가 파생시킨 한국인 특유의 애끓는 가슴앓이를 달래줄 노래가 필요했던 것이다. '가슴 아프게'는 당대의 애환을 통찰한 음악인들의 적시타였다.

전남 목포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남진(본명 김남진)은 목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1967년 '가슴 아프게'를 부르면서 대중적인 가수가 된 그는 해병대원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며 위문공연에 나섰다. 1970년 제대 후에는 '그대여 변치 마오'가 다시 유명세를 타면서 60여 편의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 거침없는 인기 가도를 달렸다. 남진은 나훈아와 함께 1960~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양대 산맥이었다.

남진은 '가슴 아프게' 덕분에 당시 인기 절정의 여배우 문희와 함께 동명의 영화에도 출연하는 행운도 누렸다. 노래는 동향의 후배 여가수로 염문설이 있던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과도 많이 닮았다. 하필이면 남진이 베트남에 파병되었을 때 나온 노래였다. 미남의 만능가수로 천부적인 탤런트 기질을 타고난 남진은 데뷔 60년이 넘는 지금도 방송에 출연해 노익장을 과시하는 나이를 잊은 만년 가수이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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