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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솔제니친(Solzhenitsyn)이 고발한 소련 공산전체주의 처참한 삶, 경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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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5. 11. 17:31

강성학 웹용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오늘날 대한민국에선 가짜 뉴스를 포함해서 거짓말이 만연하고 공포정치가 은밀히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좌익 전체주의적 신드롬(syndrome)이다. 종북 및 친북 그리고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사회의 모든 곳에서 공격하고 있다. 다가오는 6월 3일 대선을 정점으로 총공세를 할 것으로 보인다. 자유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몹시 위태롭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주관적 행복의 추구권을 전제로 각자가 모래알처럼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아가는 외로운 세계다. 그러나 이런 삶의 개척에 지친 사람들은 깊은 유대감을 주는 집단적 삶을 통한 뭔가 달콤한 새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20세기 전반기에 유럽에서 이런 지식인에게 새로운 소속감과 비전을 제시하고 허무주의적 사회분위기를 서서히 파고드는 것이 좌와 우의 전체주의 사상이었다. 한 세기 후 아시아에서 21세기 전반기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좌익의 전체주의 유혹과 동시에 위협을 받고 있다. 좌익의 도전은 건국 이래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최근에 국민적 안보의식의 해이가 극에 달하자 총공세의 정점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와 진보의 독트린인 거대한 종말론적 환상에 젖은 공산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폭군이나 동양적 전제군주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예언했던 그런 사회가 결코 아니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전체주의의 고전적 연구에서 전체주의는 20세기의 새로운 형태의 특이한 정체로서 완전한(total) 지배를 위한 테러(terror)를 핵심적 특징이라고 밝혔다. 20세기엔 대규모 선전과 선동 그리고 테러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후 소련에서 추방되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졌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은 소련 공산전체주의체제의 악마적 통치를 직접 체험했다. 그는 소련 공산전체주의의 특징은 테러와 함께 거짓말(lie)이라고 증언했다. 이런 큰 차이는 아렌트가 주로 히틀러의 나치스 정당이 지배했던 우익의 전체주의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반면에 솔제니친은 소련의 좌익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직접적 체험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치인들과 언론의 거짓말이 주저 없이 판을 치고 일반 국민들이 아무 잘못이 없이도 막연한 공포에 마음을 졸인다면 그런 사회는 분명히 전체주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전체주의 체제의 목적은 사실과 허구 그리고 진실과 허위 간의 구별을 없앤다.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개인들을 불필요한 존재(superfluous)로 만드는 초현실(surreality)로 대체하는 것이다. 은근한 공포가 밀려들고 멋대로의 거짓말이 처벌되지 않고 만연한다면 그 사회는 분명히 전체주의의 질병이 이미 심각한 상태다. 대한민국은 분명히 좌익 공산전체주의의 치명적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 국민은 이런 위험에 무감각한 채 서서히 좌익 공산전체주의의 궤도에 접어든 것이다. 이것은 프라이팬에서 불로 뛰어드는 어리석은 집단적 행위다. 유혈혁명 없이도 공산전체주의 수립이 가능해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공산전체주의체제의 메카이자 롤 모델인 소련 공산전체주의체제의 제1차적인 특징은 역시 테러, 즉 공포정치다. 솔제니친이 고발한 소련은 우선 모든 국민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표현의 자유를 말살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정치적 삶이 사실상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해 전쟁을 벌였다. 역사적 기억과 전통적 믿음을 공격하면서 거대한 변태적 정치질서, 즉 인간의 개성과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의 바로 그 가능성을 배제하는 사실상 반정치적 질서를 수립했다. '공포의 속국(vassals of fear)'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진실로 거의 모두가 배신과 거짓말에 의존했다. 이것은 시민적 우애와 사회적 신용을 폐지하고 인간영혼의 순결에 치명적 위협을 가했다. 솔제니친은 소련 테러의 노골적 만연함을 강조했다. 매순간 인간들이 죽거나 태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체포되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 이 공포는 어느 성인도 예외가 없었다. 집단농장의 농부든 공산당 정치국원이든 모두가 취약했다. 한 번의 부주의한 말이나 몸짓은 그를 돌이킬 수 없는 심연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공포가 몽테스키외의 불가결한 카테고리를 이용하여 말한다면 '원칙' 즉 소련정권 행동의 샘은 아니었다. 대신에 그 명예는 소련의 정치기계를 작동시키고 진실이든 아니면 상상이든 '인민의 적들'의 탄압을 요구하고 또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장악되었다. 소련의 공산전체주의 체제는 몽테스키외나 헤겔에 의해서 묘사된 그런 '동양적 전제정치(oriental despotism)'도 아니었다. 동양적 전제정치의 희생자들은 거의 전적으로 지배 엘리트로부터 나왔지만 소련의 탄압은 과거 차르 시대에 살아 있던 모든 층의 시민사회를 공격했다. 또한 동양적 전제정치는 관습적인 종교적 복종에 대한 호소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잔혹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행하지도 않았다.

레닌이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같은 순수한 광신자였다면 스탈린은 고전적 역사가들과 철학자들이 묘사한 전제군주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지배력의 행사는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 없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역시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했으며 유일한 마르크스-레닌주의 해석가요 수호자였다. 소련의 수용소와 탄압의 제도는 소련정권 그 자체와 동일한 시공간에 존재했으며 스탈린의 일탈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땅에서 모든 종류의 '해로운 벌레들(harmful insects)'을 축출하려는 음흉한 의도를 가진 레닌에 의해서 시작된 공산체제를 스탈린이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공산전체주의의 전성기, 즉 그것의 가장 전체주의적 시기에 수용소의 귀신이 소련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매일 출몰했다.

솔제니친은 소련에서 공포가 항상 체포의 공포는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숙청, 사찰, 안보에 관한 질문지의 완성, 일자리에서 해고나 추방을 포함하는 온갖 즉각적 위협들에 관해서 썼다. 그리고 그는 시민들이 자기 보존을 위해 사용한 거짓말과 속임수를 강조했다. 이런 끊임없는 위협들의 축적효과는 집합적 공포로 인간 자신의 중요성과 모든 권리의 결핍에 대한 정확한 의식을 가져왔다. 솔제니친은 사람들이 친구들과 가족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한 환영 같은 세계를 묘사했다. 공포가 영혼들을 마비시켰고 사회를 분자(分子)화했다. 마음의 평화란 소련 시민들이 결코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라고 그는 썼다. 그런 질서는 인간의 몸과 영혼을 너무 짓누른다. 그것은 인간정신을 파괴한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단절하여 공포와 불신이 시민적 우호를 대체하게 한다. 공포와 불신의 전제조건들 중의 하나는 일반적 노예상태다. 소련 시민들은 거주의 자유가 없었고, 어느 노동자도 자기 마음대로 일을 그만 둘 수 없었다. 어느 집도 팔거나 임대할 수 없었다. 자유와 이동에 대한 제약으로 인해 자기가 살거나 일하는 곳에서 감히 항의한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 되었다. 노예 상태가 대규모 소련 시민들에게 안주와 복종을 보장했다.

솔제니친은 소련 사회에서는 가족을 포함하여 아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주 깊었다고 기록했다. 자신의 보존이나 물질적 이득을 위해서 자기의 친구들이나 동료 노동자들, 그리고 동료 시민들은 자기가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먼저 밀고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약화시키는 목적을 넘어서 다른 목적도 있었다. 정권에 포섭당한 사람은 누구나 공개노출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정권의 지속적 안정에 아주 열성적이다. 소련공산정권은 모든 사람들은 전체주의의 망 속에서 어느 정도 공범으로 만들었다. 전체주의적 허위는 희생자들을 억압자로 전환시키는 데 동일한 역할을 했다. 전 체크슬로비아의 대통령 바클라르 하벨(Vaclav Havel)이 지적했듯이, 탄압은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이 아니라 처음에 희생자가 된 사람들의 배신과 거짓말에 의해서 심화된 준-자동적 탄압의 망이 창조된다. 그리하여 배신이 하나의 생존형태가 되었다. 인간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가장 덜 위험스러운 형태의 생존은 꾸준한 배신이라고 결론지었다. 솔제니친은 배신의 단계를 가족을 포함하여 불운한 옆 사람의 포기에서 '소련인민의 적들'이라는 의혹을 받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거나 재-규탄하는 단계를 기술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가족의 안전을 빌미로 이런 배신의 겁쟁이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가장 부끄러운 방식으로 타인들을 배신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구매했다. 솔제니친은 소련 대다수의 시민들은 이런 배신의 장에서 살기로 선택했으며 그들의 이성적 사고의 최고의 힘은 배신에 관해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최선의 사람들이 도끼 밑에 떨어졌으며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담대하고 또 가장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변태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소련의 공포는 총명하고, 현저하며 보다 높은 수준의 모든 사람들을 고의적으로 파괴하여 악화가 양화를 추방하는 수단이었다. 고결한 사람들은 사라지고 인민들의 죽어가는 영혼들만 남았다.

소련 공산전체주의의 또 하나의 중대한 특징은 거짓말이 생존의 형태였다는 점이다. 솔제니친은 체계적인 허위가 소련 공산전체주의 속성이라고 믿었으며 그 허위는 스탈린이 죽고 스탈린 지배의 최악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항구적인 거짓말이 배신과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생존의 형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말은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거짓말과 모순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 일반적이고 공통된 거짓말은 이데올로기 그 자체였다.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이 인간의 본성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거짓말이다. 기존 관용구들의 모음, 즉 선발된 기존 거짓말들은 공산주의란 지금까지 기존의 사회들을 판단하는 데 사용된 기준들이 아니라 다른 기준들에 의해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도덕적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인 양심, 정의 그리고 옳고 그름이 틀에 박힌 말들로 대체되었다. 그런 틀에 박힌 말들이 모든 교과서나 언론기사들을 장식했고 일반적이고 공통된 거짓말의 도구들이었다. 이데올로기의 틀에 박힌 말들은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이 공적 공간이 되는 대신에 그들에게 개인과 집단적 삶에 관한 진실에 접근을 부인했다. 모두가 거짓말 속에 살았고 절대적 허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들을 수치스럽게 되풀이함으로써 그것을 강화했다. 소련사회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연단에 서거나 한 페이지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솔제니친에 의하면 이데올로기적 거짓말이 소련을 정의하는 특징이었다. 일반화된 거짓말이 소련의 삶을 묶는 아교로서 지속되었다. '생존형태로서의 거짓말'에 관한 솔제니친의 설명은 거짓말의 나라에서 아이들을 기르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도덕적 딜레마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공포, 배신과 허위가 지배하는 세계는 따뜻한 마음도 역시 없는 세계다. 잔혹성(cruelty)은 배신과 존재의 형식으로서 거짓말의 필연적 산물이다. 피에 젖은 사람들은 보다 더 잔인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그 자체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는 계급의 적들을 처벌한다는 이름으로 계급적 잔혹성을 칭송하고 서서히 주입시킨다. 친절, 연민, 그리고 자비가 조롱당했기 때문에 수많은 소련의 시민들은 피에 취했다. 솔제니친은 계급적 잔혹성은 거짓말이 은밀히 퍼지는 수단이었으며 품위 있는 정치질서에서는 설 자리가 없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도덕률, 즉 옳음과 그름 그리고 선과 악의 영원한 구조를, 그리하여 모든 정치적 질서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들을 공격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1990년 이후 러시아가 국가들의 공동체 속으로 복귀한 것은 무엇보다도 거짓말에 뿌리를 둔 이데올로기 정권의 계급적 카테고리보다는 보편적 가치와 미덕의 인정에 의해서 표시되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 두 얼굴의 탈을 쓰고 국민들과 전쟁을 하는 정치인이나 정권은 정의에 관해서 신경을 쓰고 도덕률에 충실한 인간들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없다. 여기서 북한의 김일성정권은 스탈린의 소련 공산전체주의의 제국주의적 도구였던 코민테른의 프랜차이즈 지점에 불과했다. 인간답게 살려면 대한민국의 이곳저곳에서 지금 노골적으로 출몰하는 좌익 공산전체주의의 망령을 경계하자.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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