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연극 '헤다 가블러' 공연 장면_좌_김정호_우_이영애 | 0 | 연극 '헤다 가블러'의 한 장면. /LG아트센터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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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자기 의지로 자유롭고 용감한 일을 할 수 있다는 해방감. 아름답고 빛나는 일이에요."
헤다 가블러로 분한 이영애의 낭랑한 음성이 LG아트센터 서울 LG시그니처홀의 객석 1300석에 오롯이 울려 퍼졌다. 영화 '봄날은 간다', '친절한 금자씨' 등 예술성 높은 작품에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온 베테랑 배우답게 이영애만의 독보적 아우라가 연극 '헤다 가블러'의 무대를 감쌌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1890년 작인 '헤다 가블러'는 억압된 시대에 자유를 갈망하는 한 여성의 내면을 다룬 작품이다. 헤다는 모든 남성이 흠모하는 아름다움을 가졌지만 들끓는 욕망과 냉소적인 차가움, 자기 파괴적 심리를 가진 복잡한 여성이다.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는 동안 매기 스미스, 아네트 베닝, 이자벨 위페르, 케이트 블란쳇 등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헤다를 연기했다. 이 어렵고도 매력적인 헤다를 구현해내기 위해 이영애가 3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거대한 무채색 벽으로 둘러싸인 무대 위, 이영애는 독보적인 마스크와 하이톤의 목소리로 자신만의 헤다를 만들어갔다. 냉정한 카리스마와 서늘한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그의 헤다는 마치 얼음 속에 갇힌 불꽃처럼 내면의 욕망과 분노를 품고 있었다.
 | 연극 '헤다 가블러' 공연 장면 - 무대 | 0 | 연극 '헤다 가블러'의 한 장면. /LG아트센터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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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봉 디자이너가 설계한 무대는 헤다의 심리 상태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창문도 문도 없는 거대한 회색빛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헤다가 결혼 후 갇힌 정신적 감옥을 상징했다. 전인철 연출은 "이 공간은 헤다의 내면세계이며, 삼면의 벽은 그를 압박하는 사회적 질서"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모든 배우가 무대에 동시에 등장해 극 내내 퇴장 없이 머문다는 것이다. 자신의 장면이 아닐 때는 무대 한편의 의자에 앉아 헤다를 응시하는 배우들의 존재 자체가 헤다에 대한 사회적 압박과 감시를 형상화했다.
 | 연극 '헤다 가블러' 공연 장면_이영애4 | 0 | 연극 '헤다 가블러'의 한 장면. /LG아트센터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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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무대 정면 벽을 스크린으로 활용한 라이브 영상 기법도 인상적이었다. 가정부 베르타 역의 조어진이 핸디캠으로 헤다를 가까이에서 촬영하면, 그 클로즈업 영상이 벽면에 투사됐다. 이는 대극장의 특성 상 배우의 표정 연기를 가까이서 볼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선 효과적 방법이었다. 관객들은 헤다가 총구를 겨누거나, 원고를 불태우는 장면에서의 섬세한 표정 연기를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헤다 가블러'는 이영애의 연극 복귀작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출연 배우 전체의 호흡에서 비롯됐다. 학문 외에는 관심 없는 순진한 남편 테스만 역의 김정호, 헤다의 심리를 꿰뚫어 보며 은밀하게 접근하는 브라크 판사 역의 지현준, 과거 헤다의 연인이자 불운한 천재 작가 에일레트 역의 이승주는 각기 다른 매력으로 헤다를 둘러싼 세 남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특히 헤다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테아 역의 백지원은 고요하지만 단단한 의지를 지닌 인물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며 헤다의 복잡한 감정을 부각시켰다.
 | 연극 '헤다 가블러' 공연 장면_좌_이영애_우_지현준 | 0 | 연극 '헤다 가블러'의 한 장면. /LG아트센터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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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이어의 각색과 전인철의 연출은 19세기 유럽이라는 원작의 시대적 배경을 지우고, 주변의 압박과 제약에서 해방을 갈망하는 보편적 인간의 이야기로 변모시켰다. 135년 전 입센이 그린 헤다의 고독과 욕망, 자기 파괴에 이르는 여정은 현대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헤다의 36시간을 그린 이 작품은 아름답고 당당한 귀족 출신 여성이 권태로운 결혼 생활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다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제약과 억압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하는 현대인의 고뇌를 비춘다. 공연은 6월 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