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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시중은행장이 직원들과의 만남에서 한 얘기입니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은행들도 이 같은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이죠. 특히 지난 2002년 주 5일제를 선제적으로 도입했던 은행들이 이번에도 선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합니다.
금융노조도 지난 7일 성명을 통해 금융 노사가 먼저 나서 주 4.5일제 시대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금융노조는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와의 산별 중앙교섭에서도 주 4.5일제 시행과 노동시간 단축을 의제로 상정하며 선제적인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달 23일 노조 창립 기념식과 함께 '주 4.5일제 포럼'을 개최를 예고했는데, 이를 계기로 사측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갈 것으로 보입니다.
제도 도입에 적극적인 금융노조와 달리, 은행들은 당장에 제도 시행에 따를 부작용을 우려하는 모습입니다. 주 4.5일제와 노동시간 단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은행 영업점을 찾는 고객들의 불편이 커질 수 있는 데다, 은행권만 단독으로 영업시간이 줄어들 경우 고객 기업들과의 거래나 업무에서 미스매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제도 도입으로 인한 생산성 저하 역시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죠.
현재의 서비스 수준을 유지하려면 인력 증원이 필수적이지만, 그간 경영 효율성을 이유로 인력을 꾸준히 감축해온 은행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매년 희망퇴직 규모를 확대하며 기존 인력을 감축해온 상황에서 신규 채용을 늘리기는 쉽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결국 노동시간을 줄이되, 업무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 병행되지 않으면 은행들이 제도 도입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은행들이 업무 효율 제고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생성형 AI(인공지능) 에이전트를 도입해 내부 업무에 적용하거나, 업무 자동화 영역을 넓히는 등 디지털 전환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검증된 인력을 보다 낮은 비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퇴직직원 재채용도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사회적 논의도 충분히 이뤄져야 합니다. 노동시간 단축 문제는 단순히 노사 간 조율만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닌 만큼, 정부와 국회, 금융당국 등과의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은행권에서도 정부 정책 방향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각 은행들이 성급히 제도 도입을 결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들어, 정부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마련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원하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입니다. 제도 도입에 앞서 충분한 준비와 대응 방안이 마련돼야만 업무 효율과 삶의 질 개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습니다. 은행과 금융당국, 정부가 원활하게 합의점을 찾아가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