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이 사라진 이들
의료비 고사하고 기초 지원도 못받아
병 얻고 10년째 F-1비자로 겨우 연명
죽으면 어디에 묻히게 될지 벌써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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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탈북민 A씨가 살고 있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집 앞. 녹슨 현관문과 덧댄 쇠창살은 그의 열악한 생활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집 문턱은 겨우 10㎝도 안 되는, 사람 발목 정도의 높이였다. 장마철 비가 쏟아진다면 집 안까지 들어찰 정도였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땐 허름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왼편의 미닫이문을 열면 부엌과 화장실, 세탁기가 한데 몰려있었다. A씨가 잠자는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을 지내는 공간이었다. 벽지 대부분은 곰팡이가 슬어있었고 덕지덕지 덧붙인 흔적도 보였다. 워낙 습한 탓에 뜨는 벽지를 못으로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A씨는 침실이 있는 반대편 문을 열면서 "방바닥이 더러우니 앉지 말라"고 했다. 방엔 1명이 간신히 누울 침대와 수납장, 텔레비전, 전자레인지, 밥솥 등이 쌓여 있었다.
뇌 혈전 후유증으로 숨을 헐떡이던 A씨는 "무국적자로서의 삶이 이렇다"고 한탄했다. 그는 의료비 혜택은 고사하고 정부의 기초 생계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불편한 몸으로 일을 할 수도 없는 A씨는 탈북난민인권연합회의 도움 덕에 그나마 이 정도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A씨는 2010년 아픈 몸을 이끌고 탈북하다 신분증을 폐기한 것을 후회했다.
당시에는 강제 북송이 두려워 어쩔 수 없었지만, 이토록 가혹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중국에서 3년을 숨어 살던 A씨는 혹한이 이어지던 2013년 어렵게 한국에 입국했다. 그런데 탈북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화성 외국인보호소로 보내져 1년 6개월을 갇혀 지냈다. A씨는 "들어갈 땐 겨울이었는데 나와 보니 봄이 두 번이나 지나갔더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A씨는 보호소 시절 하루 종일 벽만 보며 지냈다고 했다. 난민 신청도 해봤지만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사이 그는 병을 얻었다.
A씨는 "의사가 죽게 놔둘 순 없다며 혈관 1개를 뚫어 심장을 겨우 뛰게 했다"며 "하지만 10년째 F-1 비자로 생활하고 있어 직업도 가지지 못한 채 겨우 생을 연명하고 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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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두 달 전부터 일이 끊겼다. 무직 기간이 길어지자 불안감도 더 커졌다. 이날도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지역 일대를 다녔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B씨는 "먹고살기 힘들어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왔는데, 아무도 일을 맡겨주지 않는다. 이달 안에는 일자리를 마련해야 하는데 큰일"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B씨는 강제 북송이 두려워 중국에서 위조 신분증을 만든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노모도 같은 상황이기에 더욱 답답한 심경이다.
B씨는 "한국도 내 조국이라 생각하고 이곳에 왔다. 실제로 모든 게 똑같은데, 나는 무국적자가 됐다"며 호소했다. B씨는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무국적자인 내가 죽으면 어디에 묻히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