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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넘어서기 위한 한 여인의 결단과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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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8. 05. 08:14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 리뷰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36년 여정
여성 서사의 마지막 장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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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모시는사람들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무대 위에서 직접 마주한 '춘섬이의 거짓말'은, 지금껏 말해지지 않았던 여성의 삶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밀어올렸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펼쳐온 여성 서사의 여정은, 이 작품을 끝으로 마침내 마지막 장을 넘긴다.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은 '조선여자전' 시리즈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으로, 역사에서 지워졌던 여성들의 존재를 무대 위에 되살려온 작업의 정점이자 응축된 결실이다. 이번에는 '홍길동'이라는 영웅 서사의 이면, 그 시작에 있었던 이름 없는 여인 '춘섬'의 삶을 정면으로 조명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홍길동의 어머니'를 상상해 재구성한 역사극이 아니다. 작가이자 연출을 맡은 김정숙은 '거짓말'이라는 행위를 여성의 생존 전략이자 윤리적 결단으로 전환시키며, 한 여성이 어떻게 시대의 폭력과 억압 속에서 삶을 '짓는가'를 탐색한다. 거짓은 여기서 죄의 서사가 아니라,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진실을 지켜내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자 고통의 조건 아래에서도 선택할 수 있었던 인간적 존엄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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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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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모시는사람들
주인공 춘섬은 대대로 종살이를 해온 집안의 딸로, 숯을 굽는 개불이와의 사랑 속에 혼례를 꿈꾸며 뱃속에 아이를 품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의 결실은 축복이 아니었다. 그 무렵 홍대감은 청룡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고,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징조로 여긴다. 부인의 거절에 부딪힌 그는 종년인 춘섬을 불러 겁탈하고, 이후 춘섬의 임신 사실이 드러나자 아이는 자연스레 '홍대감의 아이'로 간주된다. 춘섬은 이 아이가 실은 개불이의 아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이가 양반가의 자식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적어도 종의 운명만은 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침묵을 택한다. "이 아이는 홍대감의 아이요." 춘섬의 이 거짓말은 곧, 계급의 굴레를 부수기 위한 모성의 전략이자 윤리적 결단이 된다. 타인의 욕망에 파괴된 몸으로, 누군가의 미래를 지켜내기 위해 감내한 침묵과 거짓. 그것은 삶을 짓는 어머니의 방식이었고, 부조리한 세계에서 존재를 구해내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쫑쫑이, 딸끝네, 춘섬의 어머니처럼 함께 고통을 나누며 조용한 연대를 실천하는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춘섬의 결정을 묵묵히 지지하거나, 거짓말을 함께 짓는 데 힘을 보탠다. 반면 매파나 초란이는 춘섬의 편에 서지 않는다. 매파는 춘섬을 계급 질서 속의 거래 대상으로만 대하며, 초란이는 거짓말을 의심하고 폭로하려 한다. 이처럼 극은 여성이라 하여 결코 단일한 입장이나 태도를 지니지 않음을, 그 안의 균열과 갈등까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섬이 짓는 거짓말은 고립된 절규가 아닌, 연대와 배반이 교차하는 현실 속에서 끝내 지켜낸 존엄의 한 조각이다.

연출 김정숙은 연극의 형식과 미장센을 통해 이 고전적 주제를 생생하게 체화한다. 자연을 닮은 무대 구성-너럭바위, 억새풀, 마당 공간-은 단지 배경이 아닌, 등장인물의 내면과 감정의 물성을 입체적으로 담아낸다. 장면 전환은 대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되, 조명과 음악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물들이며 극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춘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시대의 억압은 장면마다 교차하며 서사를 밀도 있게 구축한다. 특히 아이의 운명을 두고 개불이와 홍대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장면은, 배우의 감정 연기와 연출의 흐름이 절정에 도달하는 인상적인 순간이다. 이때 관객은 춘섬의 목소리를 통해 단지 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억눌려온 여성들의 생존 서사를 마주하게 된다.

무대 위 배우들의 앙상블은 공연의 또 다른 중심축이다. 그중에서도 춘섬 역을 맡은 송혜지는 극의 중심을 단단히 붙잡으며 탁월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순진한 사랑을 품은 소녀에서 생존을 위해 침묵과 결단을 택하는 어머니로 이행하는 감정의 결을, 섬세한 시선과 절제된 호흡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특히 거짓말을 결심하는 순간의 침묵과 떨리는 목소리는 무대 전체를 감싸는 긴장감으로 이어진다. 개불이 역의 고예본은 순정과 현실 사이의 균열을 신체와 목소리로 표현하며, 인물의 내면을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

매파 역의 성장순은 전통극 특유의 리듬감과 강렬한 무대 장악력으로 극의 긴장과 활기를 동시에 끌어올린다. 딸끝네 역의 김명애는 능청스러운 몸짓과 코믹한 리듬으로 긴 서사의 흐름에 숨 쉴 틈을 만들어준다. 안방마님 역의 정연심은 춘섬과 개불이를 불러들이는 장면에서 단호하면서도 복합적인 감정을 담은 결정을 내리며 극의 서사를 정리한다. 그녀의 판단은 춘섬의 거짓말이 던진 질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관객에게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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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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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모시는사람들
관객의 몰입을 이끄는 건 단지 이야기나 연기만이 아니다. 장면마다 치밀하게 설계된 조명과 음악, 절제된 소품 사용은 '여백의 미'를 통해 조선의 질서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별당 장면에서 춘섬이 조명을 받으며 중심에 놓이는 순간, 관객은 그녀의 선택이 지닌 무게를 고스란히 체감하게 된다. 극 후반, 춘섬이 "나는 이제 종도, 종년도 아니고 어머니로 살 거예요. 이게 진짜요"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모든 여성들의 선언이자, 우리 시대의 모성이 어디에서 다시 태어나는지를 알리는 메아리처럼 들린다.

'춘섬이의 거짓말'은 단지 여성의 희생을 재현하는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모성의 위기'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것을 사회적 조건과 윤리의 문제로 끌어올린다. "우리 어머니가 불행해 보였기에 나도 어머니가 되기 싫다"는 오늘날 여성들의 고백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춘섬이라는 인물을 통해 모성을 다시 감각하고, '존엄한 결단'으로서의 어머니를 재정의한다. 그런 점에서 이 연극은 시대착오적이지 않고, 매우 동시대적이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한국 사회가 가장 절실히 되새겨야 할 문장들을 품고 있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은 36년간 한국 연극계에서 "한 번 공연하고 사라지는 무대"가 아니라, "시간과 함께 성장하는 공연"을 지향해왔다. '춘섬이의 거짓말'은 그 긴 시간의 총결산이자, 조선의 그늘에서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연극은 끝나지만, 춘섬이 지은 거짓말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누군가를 살리고자 하는 거짓말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희망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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