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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의 기억, 연극으로 되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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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8. 07. 08:03

연극 '꿈속에선 다정하였네'
제10회 늘푸른연극제 공식 초청작
배우 박정자의 독백으로 피어나는 사랑과 회한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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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음을 앞둔 어느 밤, 지난 시간을 하나씩 꺼내보며 묻는 사람이 있다. 왕실의 안에서 태어나, 정치의 가장 거센 소용돌이 한복판에 놓였던 여인. 사도세자의 아내로, 영조의 며느리로, 정조의 어머니로 살아야 했던 한 사람. 그 이름, 혜경궁 홍씨.

연극 '꿈속에선 다정하였네'는 조선 왕실의 안에서 한 여성으로 살아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삶을 섬세하고도 깊은 시선으로 되짚는 무대다. 그리고 이 여정을 이끄는 목소리는 배우 박정자다. 제10회 늘푸른연극제가 선정한 대표 배우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대 위에서 살아온 그의 독백은 단순한 연기가 아닌 '기억의 육화'다. 그가 다시 연극으로 불러내는 혜경궁 홍씨는, 역사책 속의 인물이 아니라 삶의 모든 층위를 가진 인간으로,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7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성북구 서울연극창작센터 내 '서울씨어터 제로'에서 공연된다. 제10회 늘푸른연극제의 공식 초청작으로, 올해 축제의 대표작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번 작품은 혜경궁 홍씨가 남긴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록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살아 있는 인물로서의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되짚으며,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감정들과 차례로 조우하는 서정적 무대다. 삶의 말미, 그녀는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사도세자의 환영과 마주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한 마디를 되새긴다.

"당신 참 무서운 사람이야."

그 말은 곧장 귓가에 파고들고, 그녀는 스스로 묻는다. 왜 나는 끝내 다정한 사람이 되지 못했는가.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도 전하지 못한 채, 서로를 떠나야 했던 그 시절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무대는 현실과 기억, 생과 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정서 속에 겹쳐지고, 혜경궁의 독백은 곧 삶 전체를 관통하는 회한의 파노라마가 된다. 그녀가 털어놓는 감정은 단순히 사적인 고백이 아닌, 억압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의 자의식이며, 역사의 뒤편에 남겨졌던 감정들의 집적이다.

이 무대를 완성하는 중심에는 배우 박정자가 있다. 1962년 '페드라'로 데뷔한 그는 16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한국 연극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무대 위 그의 목소리는 단순한 언어 전달을 넘어 하나의 풍경이자 감정의 구조로 기능한다. 이번 무대에서 그는 혜경궁 홍씨의 시간을 오롯이 홀로 껴안으며, 인물의 격정과 절제, 슬픔과 냉정, 자책과 연민을 동시에 품어낸다.

연출은 한국 연극계에서 굵직한 여성 서사를 구축해온 연출가 한태숙이 맡았다. 그는 '하나코', '엘렉트라', '세일즈맨의 죽음' 등에서 인물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조형하며, 차갑고도 격정적인 무대언어를 구축해온 인물이다. 그는 '한중록'을 가리켜 "그 자체로 생생한 모노드라마"라며, 혜경궁이 자신의 삶을 2인칭으로 기술하며 객관화하는 시점에 매료됐다고 밝혔다. 그 언어 안에 담긴 절제와 분노, 품격과 고통이 어우러진 균형감은, 연극이 지향하는 감정의 밀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이번 공연은 박정자의 독백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도세자 역의 강필석, 복례 역의 김현아가 함께 출연해 혜경궁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과 기억을 살아 있는 인물로 무대 위에 구현한다. 단순한 상징이나 음성화된 기억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당대의 시간으로 관통하는 인물로서 기능한다. 여기에 국악 연주자 원 일이 직접 작곡·연주하는 음악은,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사의 정서를 더욱 고조시킨다.

시각적 구성도 인상적이다. 조명 디자이너 김창기의 빛은 인물의 내면을 따라 흐르며 공간의 결을 바꾸고, 박은혜의 무대 디자인은 기억 속 공간과 환상의 경계를 효과적으로 분절시킨다. 의상과 소품을 맡은 이유숙은 고전미와 현대적 실험성을 겸비한 디자인으로 인물의 외형을 극의 정서와 밀착시키고, 이지송의 영상은 무대 전체의 감각을 한층 풍부하게 확장시킨다. 연출의 표현대로 "가장 아날로그적인 접근으로 솔리드한 상상력을 펼치는" 이 시도는, 단순한 역사극의 형식을 넘어서 무대예술의 총체성을 향한 실험으로도 읽힌다.

'꿈속에선 다정하였네'는 단지 왕실의 비극이나 역사적 회고의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 무대는 '끝내 전하지 못한 감정'과 '한 번도 다정하지 못했던 존재'를 마주하는 용기의 이야기다. 누군가를 보내고도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던 사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말하지 못했던 시간들. 이 무대는 그런 존재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꿈속에서라도 다정했으면 좋겠다"고.

이번 공연은 사단법인 한국연극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창작센터의 후원을 통해, 화이트캣시어터컴퍼니가 제작을 맡았다.

늘푸른연극제는 만 70세 이상 원로 예술인들이 중심이 되어 참여하는 국내 유일의 연극 축제로, 단순한 회고나 복원에 머물지 않고 이들이 현재 어떤 예술을 창작하고 있는지를 동시대의 무대 위에서 조명한다. '기록'이 아닌 '현재형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연극계 원로들의 삶과 예술이 관객에게 살아 있는 언어로 전달되는 특별한 장이다. 올해로 10회를 맞은 이 축제는 연극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과 배우를 선정해 그들의 예술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해오고 있으며, '꿈속에선 다정하였네'는 그 흐름 속에서 탄생한 한 편의 무대다.

이번 무대가 관객에게 남길 감정의 여운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어느 밤, 끝내 닿지 못했던 감정을 따라가는 이 여정이, 우리 자신의 어떤 기억과 감정에도 조용히 겹쳐질 수 있다면. 혜경궁 홍씨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그 말은 오래도록 귓가에 남는다. "꿈속에선, 다정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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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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