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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험하다 끝내 무너진 감정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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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8. 07. 17:02

연극 ‘장난삼아 연애마소’ 리뷰
뜨거운 고백과 차가운 거절 사이, 그들이 남긴 것은 부서진 마음뿐
감정은 놀이가 될 수 있을까… 고전이 묻는 사랑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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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프로젝트그룹 낙타
사랑이란 감정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흔드는 가장 오래된 질문이자 가장 최근의 고민이다. 연극 '장난삼아 연애마소'는 바로 그 질문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장난처럼 시작된 관계가 어떻게 진심을 파괴하고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2025년 서울의 무대 위에서 다시금 사랑이라는 감정의 민낯을 관객 앞에 내던진다.

이 연극은 단순히 '옛사랑의 고백'이나 '귀족 청춘들의 연애담'을 그리는 데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의 기만과 자존심, 진심과 오해가 만들어낸 한 편의 정념극이자, 인간 관계의 가장 섬세한 결을 탐구하는 정교한 심리 드라마다. '사랑으로 장난치지 마라(On ne badine pas avec l'amour)'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극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감정의 놀이가 결국 얼마나 잔혹한 결과를 낳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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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프로젝트그룹 낙타
작품의 중심에는 사촌지간인 페르디캉과 카미유가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이들은 각자의 배움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남작은 이들이 결혼하기를 바라며 성대한 환영을 준비하지만, 두 사람은 정반대의 태도로 서로를 마주한다. 페르디캉은 예전과 다름없이 다정하게 다가서지만, 카미유는 수도원에서 감정을 억제하며 성장해 온 인물로, 그의 접근을 단호히 밀어낸다. 그녀는 인간적인 사랑에 대한 회의와 경계심을 드러내며, 그 감정을 의도적으로 시험한다.

페르디캉 역시 단순한 구애자는 아니다. 그는 진심을 드러내다가도 카미유의 냉정한 태도에 상처를 입고, 점차 자존심과 허영심에 휘둘린다. 결국 그는 로제트를 감정의 도구로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애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라는 뉘앙스를 품은 그의 행동은, 상황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몰아간다.

이 장면부터 극은 급격히 어두워진다. 사랑이 '장난'으로 변질되고, 로제트는 자신이 도구로 쓰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녀는 "나는, 나는 당신이...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라고 절규하듯 내뱉으며, 무대 한가운데서 정면을 응시한 채 울음을 터뜨린다. 객석은 숨을 죽인다. 로제트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감정의 무지와 욕망이 낳은 가장 큰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극의 후반, 카미유는 드디어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린 뒤다. 그녀는 절망에 가까운 목소리로 삶을 포기할 듯한 독백을 남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요. 아무 의미도 없어요…"라는 말은 직접적이진 않지만, 감정의 파국을 암시한다. 이를 지켜본 페르디캉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군 채 긴 침묵에 잠긴다. 이는 "우린 삶과 죽음을 장난삼아 다뤘다"는 뉘앙스의 자기 고백처럼 읽힌다.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게 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큰 상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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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프로젝트그룹 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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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극의 정조를 성공적으로 이끈 데는 김남언 연출의 힘이 컸다. 그는 고전 텍스트의 고풍스러운 언어를 충실히 재현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리듬과 현대적 감각을 절묘하게 배합했다. 군더더기 없는 동선, 상징을 강조한 미장센, 그리고 배우의 몸짓과 시선이 만들어내는 정적인 긴장감은 고전희곡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오늘날의 감각으로 관객을 설득했다. 특히 극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편지'라는 소재는 사랑의 고백이자 오해의 증거로 기능하며, 인물 간의 감정적 거리와 내면의 갈등을 가시화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했다.

무대 구성은 절제된 미니멀리즘 안에 상징성과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양병환의 무대디자인은 단순한 구조 속에서도 공간의 긴장과 변화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며, 배우의 움직임과 함께 무대의 의미가 확장되도록 설계되었다. 조명(홍문화·신예정)은 장면의 분위기와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때로는 명확한 대비로 인물의 내면을 강조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조도로 정서를 감싸 안는다. 음악(이빛나)과 안무(전소담)는 대사 사이의 여백을 채우며, 인물 간의 관계와 감정을 시적으로 풀어내는 요소로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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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는 이 작품을 단지 '복원된 고전'이 아닌, 살아 있는 감정의 서사로 탈바꿈시켰다. 페르디캉 역의 신유승은 감정의 널뛰기를 생생하게 표현하며, 사랑에 있어 자존심이라는 독을 안고 무너지는 남성의 복잡한 내면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카미유 역의 염서현은 처음에는 차디찬 신념으로, 후반에는 절절한 고백으로 인물을 구성하며, 수도원의 규율과 인간적인 감정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여인의 초상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그녀가 마지막에 토해낸 대사, "전 이제 살 이유가 없습니다"는 단지 감정의 포화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한 심연의 질문으로 다가왔다.

로제트를 연기한 손지인은 극의 또 다른 키를 쥔 인물로, 사랑받기보다는 이용당하는 순진한 인물에서 점차 자아의 목소리를 갖는 존재로 변모한다. 그녀의 서사는 고전극에선 보기 드물게 '하층 여성의 목소리'를 무대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며, 계급과 성별, 감정의 소외라는 이중 구조를 드러낸다. 이 외에도 브리댄느 신부 역의 이호준, 블라쥐스 선생 역의 이정희 등 조연들의 정교한 연기가 전체 극의 긴장과 해학을 조율하며 감정의 여백을 채웠다.

연극 '장난삼아 연애마소'는 단순한 복고적 고전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고전 속에 숨겨진 질문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말하고, 다시 묻는 용기 있는 시도다. 사랑은 언제나 진지해야만 할까? 아니면 장난처럼 시작된 감정도 결국 진심으로 자라날 수 있는가? 이 작품은 그 어떤 결론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감정의 미로 속에서 끝내 진실에 다다르지 못한 이들의 비극을 보여주며,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치명적인 장난이 될 수 있는지를 담담하게 증명한다.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마음을 붙잡는 울림이 있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게 맞을까? 아니면,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있었던 건 아닐까?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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