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는 두 음절이 품은 이별과 화해의 무게
|
무대는 2025년 도쿄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시작된다. 술에 의존하는 아버지 신이치(김신용)와 현실에 지친 딸 리카(이영주)는 사사건건 부딪히며 살아간다. 아들 료스케(장대성)가 재일 한인 역사자료관에서 일하는 여자친구 아키코(김미영)와 함께 귀향해 결혼 소식을 전하자, 신이치는 강하게 반대한다. 그 이유는 아키코 집안이 감춰온 어두운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팽팽한 갈등 속에 도쿄에 또 한 번의 지진이 일어나고, 가족은 우연히 발견한 요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통해 100년 전의 참혹한 기록과 마주하게 된다. 그날의 진실은 현재의 가족 갈등을 뒤흔들고, '안녕'이라는 인사의 진정한 의미를 새삼 되묻게 한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간토) 지방에서 진도 8.0의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다.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도시 대부분이 무너지고 화재가 번지며, 사망·실종자가 10만 명을 넘겼다. 그러나 재난의 참혹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혼란을 무마하려던 일본 정부와 일부 언론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허위 소문을 퍼뜨렸고, 이는 군경과 자경단, 일반 시민들까지 동원된 조직적 학살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는 당시 계엄령을 선포했고, 공식 발표로는 233명이지만, 국내외 연구자들은 최소 6천 명, 많게는 2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본다. 이번 작품은 이러한 역사적 참상을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상흔과 화해의 과제로 재구성해 관객 앞에 펼친다.
방은미 연출은 "'안녕'이라는 말에 담긴 헤어짐과 만남의 중의적 의미처럼, 이 작품이 과거의 아픔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를 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그는 화려한 무대 장치 대신 배우들의 숨결과 대사, 시선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울림에 집중했다. 장면 전환은 시대와 세대를 오가며 전개되고, 배우들이 맡은 1인 2역의 변주가 이를 매끄럽게 이어준다. 역사극의 무게 속에서도 희비가 교차하는 리듬을 살려 관객을 끝까지 끌어당긴다.
|
|
제작진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극작을 맡은 박수환은 오랫동안 음악가로서 경력을 쌓아온 만큼, 이번 작품에서도 대사와 장면 전개 속에 음악적 리듬과 정서를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조명은 성미림과 이재성(제주)이 맡아 무대의 감정선을 빛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며, 태극무대의 미니멀한 세트는 배우들의 연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기획에는 김원영, 김현, 우수민이 참여해 작품의 방향성을 정립했고, 홍보는 김광수가 담당했다.
'안녕 간토'는 을사늑약 120주년, 한일기본조약 60주년이라는 역사적 이정표 위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1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과거의 비극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고, 그 기억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의 몫이다. 작품은 그 물음 앞에서 관객이 '안녕'을 작별의 인사이자 새로운 시작의 선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묻는다. 나아가 무대 위에 소환된 목소리들은 단순한 과거 회고를 넘어, 기억을 이어가야 할 이유와 그 방식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촉구한다. '안녕'이라는 두 음절 속에 담긴 이별과 만남, 용서와 다짐의 무게가 객석을 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갈 다음 인사의 방향을 조용히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