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에는 석주 선생의 정신이 담긴 시문, 서간 등 자료 90여 점이 공개되고, 석주 선생의 문집인 '석주유고(石洲遺稿)'에 담긴 근대사상과 애국애족 정신은 59건의 서예작품을 통해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 39인이 1919년 2월에 만주 길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조소앙이 작성)도 있다. 특히 이상룡이 지었다는 '애국가'는 실제 간도(間島)의 신흥강습소에서 개천절 등 행사 때 불렀다고 한다.
한편 석주의 고향 안동에서는 지난 7일부터 사흘간 매일 밤 임청각 일대에서 실제 역사적 공간을 무대로 독립운동 실경(實景) 역사극 '서간도 바람소리'를 공연했다. 안동 '월영야행' 기간 막을 올린 올해 공연은 광복 80주년과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취임 100주년의 의미를 담아 석주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실경 역사극으로 재조명했다.
왜 오늘날 석주 선생을 소환하고 현창하는 데 이토록 진심일까? 선생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신의 부귀영화와 안온한 삶을 초개(草芥)같이 버리고 스스로 간난신고(艱難辛苦)의 가시밭길을 의연히 걸어간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학자였지만, 고루하지 않고 늘 깨어있으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앞날을 내다보며 실질적인 대책과 큰 그림을 그리는 선각(先覺)의 실학자요 행동하는 참 지식인이었다.
석주 이상룡은 1858년 경북 안동의 임청각(臨淸閣)에서 고성 이씨 명문가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아흔아홉 칸 한옥인 임청각은 그의 18대조 이명이 1519년에 지은 고성 이씨의 종택이자, 보물로 지정된 역사적 고택으로 안동 유림 명문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임청각은 현존하는 조선 살림집 중 최대 규모이자, 부인과 동생, 아들과 조카, 손자와 손자며느리 등 3대에 걸쳐 모두 11명의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낳은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일찍이 이상룡은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이상룡의 관심사는 유학에 그치지 않았다. 천문과 지리를 비롯해 병학(兵學)과 수학 등 실질적인 학문도 중시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의병장인 외삼촌 권세연(權世淵, 1836~1899)이 이끄는 안동의진(安東義陣)에 참가했다. 병법과 무기에 밝았던 이상룡은 의병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일본군의 신식무기를 당할 수 없어 의병들이 참패하자 이상룡은 "이는 시세에 어둡기 때문"이라며 온갖 동서양 신서적을 구해서 파고들었다.
이상룡은 근대사상을 수용한 혁신유림(革新儒林)으로 거듭나 근대적 정치조직이라 할 수 있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일제에 국권이 강탈당하자, 이상룡은 53세가 되던 1911년 1월 문중의 가산을 정리해 일가 50여 가구의 가솔을 이끌고 해외 독립기지 건설을 꿈꾸며 만주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는 결단을 내린다.
고국을 떠나기 직전, 종손으로서 마지막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 요즘 시세로 수백억원에 달하는 집과 논밭 등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집안의 노비문서도 모두 불태운 뒤였다. 고국을 떠나며 "공자와 맹자는 시렁(선반) 위에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말과 함께 그가 한시 '거국음(去國吟)'을 남겼다. 그 마지막 구절에서 "독립을 이룬 후에 고국으로 돌아와 뼈를 묻겠다(重來故國葬吾骸)"고 했다.
만주에 도착해 뜻을 같이하는 애국지사들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자치 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됐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1911년 4월 서간도 최초의 한인 자치기관이자 이후 독립운동단체들의 모태가 된 경학사는 재만한인(在滿韓人)의 복리증진, 자활대책의 강구, 자녀교육, 애국청년의 군사훈련, 독립운동기지 조성 등을 목표로 설립된 결사체다.
1912년에는 경학사를 계승한 부민단(扶民團)을 만들고 회장으로 선임됐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에는 한인지도자들과 함께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했다. 교육기관인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의 후신)를 통해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해 북로군정서 등에 지원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다.
이상룡은 늘 "의로움과 생명,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을 때는 의로움을 택하라"고 강조했다. 1925년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최고 지도자인 초대 국무령(대통령에 해당)으로 추대됐다. 도산 안창호 등 애국지사들이 그의 애국애족 멸사봉공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리더십을 존경한 까닭이다.
그러나 독립의 날을 누리지 못하고 1932년 중국 서간도 길림에서 이상룡은 74세로 순국했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 임종 직전 남긴 그의 유언이다. 그의 유해는 1990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1911년 고국을 떠난 지 79년 만의 일이다. 우리가 후손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지를 고민할 때, 석주 선생의 삶은 하나의 이정표다. 석주 선생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대한민국의 길잡이로 영원히 빛날 전설이기에, 광복절은 그의 위대한 발자취를 되짚고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다짐의 계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류석호 칼럼니스트·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