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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희망에 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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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8. 19. 10:54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침대는 가구가 아니고 희망은 고문이다. 전자는 광고카피고, 후자는 세태에 대한 자조적 목소리다. 두 문장의 공통점은 언어를 비틀어 기존 관념을 파괴하는 데 있다. 앞엣것이 범주화를 해체하여, 침대라는 제품이 추구하는 기술적 안락함을 강조하는 수행성에 있다면, 후자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제시한 거짓된 이정표를 전복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스갯소리로 초등학생들은 침대를 가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디어가 침대는 과학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코딩을 배우면서 언제든지 교정이 가능하다. 마치 시적 허용처럼 언어가 수행하는 효과적인 메시지전달의 사례로 확대재생산 될 수 있다.

문제는 희망이 고문인 까닭에 있다. '희망고문'하지 말라는 청춘들의 항의에 대처할만한 그럴싸한 논리를 대자니 무색해진다. 그렇다면 희망을 얘기해서는 안 되는 시대인가? 반문해 본다. 희망을 품고 시도한 최대치의 노력을 기약 없이 무한으로 반복해야 한다니, 고문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희망이 금기어가 돼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사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말인데, 미래를 살아본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해서 우리는 허구적 공간에서 미래를 엿본다. 윤소라 작가의 흥미로운 웹소설 '타임 트래블러'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동경대학생인 주인공은 독립운동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한다.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그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손발톱은 모두 빠져있고, 치아도 남아있지 않다. 눈과 코는 그 형체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에게 남은 자비라면 죽음뿐이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함은 그를 산송장으로 방치하는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마음속에 품었다는 이유로 그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을 최대한 연장한다.

사랑하는 이가 처한 참혹한 상황에 대해 어찌할 수도 없는 그의 연인은 우연히 타임 트래블러를 만난다.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은 한민족의 미래다. 그것을 알고 싶은 이유는, 자신의 정인에게 당신이 했던 일의 가치가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본 미래를 마음에 담고 면회를 하러 간다. 몸도 가눌 수 없는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리고 간수 몰래 가져온 극약을 손에 쥐여 준다. 옅은 미소로 응답한 그는 이제 비로소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된다.

희망은 실망하지 않는 데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희망의 제자리는 과거와 미래에 있지 않다. 현재를 놓치지 않는 데 있다. 트리나 폴러스의 그림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노랑 애벌레와 호랑애벌레는 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일찌감치 애벌레 기둥을 떠난 노랑애벌레와 달리 호랑애벌레는 기어이 그 꼭대기에 오르려 했다. 그 끝엔 아무것도 없음을 안 순간, 저 멀리서 날아오르는 노랑나비를 보게 된다. 문득 그 노랑나비가 예전의 노랑애벌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다시 애벌레 기둥을 내려온다. 그리곤 잘 알려진 결말대로 호랑애벌레는 마침내 호랑나비가 되어 비상한다. 이제 노랑나비와 함께 호랑나비도 꽃들에게 희망을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다큐멘터리영화 '독립군-끝나지 않은 전쟁'이 상영 중이다.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를 쫓아가기엔 가슴이 벅찼다. 특히 영화의 말미는 마음이 아프고, 뭉클해졌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을 같이했던 동지와 가족을 모두 잃고, 독립운동을 재기하기 위해 희망을 품고 찾은 연해주에서 홍범도 장군은 다시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불모의 땅으로 떠밀려, 비참한 디아스포라의 대열 속에 합류하게 된다.

카자흐스탄에 보금자리를 틀기까지 아사 직전의 굶주림 앞에서도 우리 동포들은 봇짐 깊숙이 곡식의 종자와 책을 품고 있었다.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장군이 돌아가시기 직전, 전 재산을 털어 동포들에게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1943년 10월 25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홍범도 장군은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그가 잔치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이유는 의병 운동에서부터 독립전쟁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준 일관된 호국정신이기도 하며, 동시에 뜻을 같이하다가 전사한 무명의 독립 열사들을 장군이 대표함에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여망이 장군에게 전이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의 동포들에게 장군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희망이었다면, 장군에겐 또한 디아스포라의 행렬에서 자신을 끝까지 믿고 따라준 동포들이 희망이었다.

이쯤에서 다시 희망을 정의하자면, 희망은 사람이다. 따라서 희망은 우리들 자신이다. 비약하자면 점차 극우화되어 가는 경향이 뚜렷한 세계적 흐름 속에서, 빛의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를 수호한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희망이다 꽃들에게 희망을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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