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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처를 예술로, 물방울에 담긴 삶…김창열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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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25. 08. 27. 09:3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작고 후 첫 대규모 회고전 12월까지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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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6·25 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근원은 거기였다."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창열(1929∼2021)이 생전에 남긴 이 말은 그의 대표작인 물방울 회화의 숨겨진 기원을 보여준다. 캔버스 위에 맺힌 투명하고 영롱한 물방울들이 실은 전쟁의 참혹한 기억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김창열 회고전'은 이러한 작가의 내면 세계와 예술 철학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작고 이후 첫 대규모 회고전인 이번 전시는 초기작부터 뉴욕과 파리에서 활동하며 완성한 대표작까지 12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전시는 '상흔', '현상', '물방울', '회귀' 4개 장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장에서는 평안남도 맹산 출신인 김창열이 16세에 홀로 월남한 후 겪은 격동의 시대를 다룬다. 1950년대 후반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을 주도하며 한국 앵포르멜 운동(감정표현과 즉흥성을 강조하는 비정형 추상미술 운동)을 이끈 그의 '제사' 연작에는 총알 자국과 탱크 바퀴 자국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훗날 그를 세계적 작가로 만든 물방울의 원형이 바로 이 총알 자국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전 출품작 '해바라기' 등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초기작 31점이 최초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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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회고전 전경. /사진=전혜원 기자
두 번째 장은 1965년 김환기의 권유로 뉴욕에 정착한 후부터 1969년 파리로 이주하기까지의 작품들을 다룬다.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고 건너간 뉴욕에서 예상과 달리 주목받지 못한 김창열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서적 이질감 속에서도 새로운 전환을 모색했다. 이전의 거친 앵포르멜 기법에서 벗어나 매끈한 화면 위에 기하학적 형태를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리 이주 후에는 기하학적 형태가 녹아내리는 듯한 유기적 형상의 '현상' 연작을 선보였다. 전시에서는 뉴욕 시기 미공개 회화 8점과 최초의 물방울 작품보다 1년 앞선 1971년의 물방울 회화 2점도 처음 공개된다.

세 번째 장은 김창열 예술의 정수인 물방울 작품들로 구성됐다. 1970년대 초 파리 외곽 마구간 작업실에서 탄생한 물방울은 오랜 조형 실험과 존재론적 사유의 결과물이었다. 김창열은 초기 에어스프레이 기법에서 시작해 신문지, 거친 생지, 모래, 나무 등 다양한 바탕재로 확장하며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물방울〉, 1979, 캔버스에 유화 물감, 80.5×100cm, 개인 소장
김창열의 1979년작 '물방울'. /국립현대미술관
마지막 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천자문 작업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명필가였던 조부에게 서예를 배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분단으로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천자문 작업에 녹아있다. 하지만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또렷하던 글자들은 점점 희미해져 시간의 흐름과 존재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다. 이 공간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후 처음 공개되는 7.8m 규모의 대형 작품도 만날 수 있다.

8전시실에는 '무슈 구뜨(Monsieur Gouttes·물방울 씨) 김창열'이라는 특별 공간이 마련됐다. 파리에서 아파트 문패에 이름 대신 물방울 하나를 새겨 넣고 살았던 김창열의 일상적 모습과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 기록들이 선보인다. 특히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상형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 국내외 최초로 전시돼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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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회고전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1965년 작 '제사'와 1990년 작 물방울 그림 '회귀' 두 작품이 마주 보는 구성으로 마무리된다. '제사' 상단의 두 개 총알 자국은 마치 눈물을 흘리는 눈 같고, 맞은편 물방울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총알 자국이 물방울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김창열 예술 여정의 압축판이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그동안 미흡했던 작가 연구를 보완하고 공백으로 남아있던 시기의 작품을 통해 김창열 예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계기"라며 "김창열이라는 예술가를 새롭게 발견하고 재정립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21일까지.

〈제사〉, 1966, 캔버스에 유화 물감, 162×13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창열의 1966년작 '제사'. /국립현대미술관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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