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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비극 ‘코리올라누스’가 다시 묻는 시대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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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9. 03. 16:45

고려대 개교 120주년 기념...세대를 잇는 배우들의 무대
영상과 연기가 직조한 새로운 해석
오늘의 현실을 비추는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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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대극회
고려대학교 개교 120주년을 맞아, 한국 연극사에서 가장 오래된 연극 단체인 고대극회가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비극 '코리올라누스'를 무대에 올린다. 오는 9월 6일부터 14일까지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202에서 펼쳐질 이번 공연은 단순한 기념 무대를 넘어, 과거와 현재, 고전과 동시대가 교차하는 드라마틱한 실험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1928년 보성전문 연극부로 시작해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온 고대극회는 1965년부터 10년마다 개교 기념 합동 공연을 이어오며, 한 시대의 연극 흐름과 호흡을 함께해왔다. 이번 '코리올라누스'는 이 전통의 궤적 속에서 고전의 무게와 동시대적 울림을 함께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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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코리올라누스'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습 현장 / 사진 고대극회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는 우리에게 낯설지만, 그 서사에는 여전히 현재를 비추는 날카로운 질문들이 숨어 있다. 로마의 전쟁 영웅 카이우스 마르티우스는 볼스키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코리올라누스'라는 칭호를 얻는다. 귀족 출신으로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용맹함을 지녔지만,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오만한 태도로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결국 로마에서 추방당한 그는 복수심에 불타 적국과 손을 잡고 로마로 돌아오고, 영웅에서 역적으로, 환호받던 이름에서 배신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겪는다.

기원전 5세기의 로마를 무대로 한 이 서사는 계급 갈등과 권력의 역학, 그리고 집단과 개인의 갈등을 치밀하게 파고들며,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고전의 명제를 다시금 증명한다.

이번 무대는 셰익스피어 전문가 이현우 연출의 세 번째 '코리올라누스'다. 2005년, 한국 연극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겨온 화동연우회와 함께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국내 초연을 선보였고, 2013년 재연을 거쳐 20여 년에 걸친 집요한 탐구가 이번 무대에서 다시 결실을 맺는다. 한국셰익스피어학회장을 지낸 이현우 연출은 섬세한 작품 해석과 과감한 무대 실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초연 당시 무너진 성곽에 15대의 TV 모니터를 설치하며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그는 이번에 한 발 더 나아갔다. 이번 무대는 기원전 5세기 로마를 촬영하는 현대의 영상 스튜디오로 설정되었고, 두 명의 카메라맨이 배우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포착한다. 객석은 때로는 로마 의사당, 때로는 전쟁터의 한가운데로 변모하며 관객을 서사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무대와 의상, 음악, 소품은 시대를 초월한 감각으로 재구성돼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작품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2005년 초연이 원작 서사에 충실한 정통 무대였다면, 2025년의 '코리올라누스'는 미디어 언어를 과감히 끌어안은 실험의 결정체다. 영상과 무대, 배우와 관객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 공간에서 '영웅 만들기'와 '영웅 무너뜨리기'가 실시간으로 교차하며, 셰익스피어 비극의 현대적 의미가 더욱 또렷하게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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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코리올라누스'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습 현장 / 사진 고대극회
무대 위 배우들의 구성은 이번 공연의 백미다. 주인공 코리올라누스 역은 '신의 바늘', '네버랜드'로 주목받은 신예 문병설이 맡아 젊음과 패기, 그리고 내면의 균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코리올라누스의 정신적 스승인 메네니우스 역에는 '삼류배우', '헨리4세' 등에서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준 중견 배우 이성용이 캐스팅됐다. 강인한 어머니 볼룸니아 역에는 독립극단을 이끌어온 배우 원영애가 무게감을 더한다. 또한 연극, 뮤지컬, TV드라마, 영화 등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 황건이 로마의 적국 볼스키의 장수 역을 맡아 코리올라누스와 불꽃 튀는 대결을 펼친다.

여기에 성병숙, 예수정, 주진모, 한은주 등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원로 배우들이 특별 출연해 무대의 깊이를 더한다. 특히 데뷔 49년 차인 성병숙과 그의 딸 서송희가 모녀로 호흡을 맞추며, 귀족의 상징인 '시민의 어머니'와 평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호민관'으로서 극의 양극단에서 서사를 팽팽하게 끌어간다.

대학 연극반 활동 이후 48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는 70대 초반의 배우부터 20대 새내기 배우까지, 무려 50여 년에 걸친 세대가 한 무대에서 함께 호흡한다는 사실은 이번 공연의 또 다른 감동 포인트다. 이들이 한 무대에서 호흡을 맞추는 순간, 연극이라는 언어가 세대를 잇는 다리가 된다.

고대극회라는 이름은 단순한 연극 동아리의 범주를 넘어, 한국 근대극과 현대극의 역사를 함께 써온 '살아 있는 연극사'다. 여운계, 손숙, 장두이, 성병숙, 예수정, 이성용, 주진모, 원영애, 이연규, 한은주, 안병식, 황 건, 조 휘 등 수많은 배우와 연출가, 극작가, 그리고 문화예술계 다방면의 인재들이 이곳을 거쳐갔고, 그 족적은 여전히 현재의 무대 위에서 유효하다. 이번 공연은 이러한 고대극회의 전통과 실험 정신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과거의 무게와 현재의 감각, 그리고 세대를 잇는 유대가 하나의 무대에서 생생히 호흡한다.

'코리올라누스'는 단순한 고전의 재현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추는 작업이다. 미디어가 영웅을 만들고 무너뜨리는 오늘의 현실, 집단과 개인의 갈등이 폭발하는 시대의 공기 속에서, 관객은 무대와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국가와 권력,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성찰이 녹아든 이 작품은, 고전이 지닌 불변의 힘을 새삼 환기시키며 우리가 왜 여전히 셰익스피어를 읽고, 보고, 논의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일깨운다.

2025년, 개교 12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시간 속에서 고대극회의 '코리올라누스'는 단순한 기념 공연이 아닌 새로운 도전의 장이 된다. 고전과 현대, 무대와 현실, 그리고 세대와 세대를 잇는 이번 공연은 과거의 유산을 미래로 확장하는 '현재진행형의 대화'다. 관객은 이 무대 위에서, 5세기 로마의 광장과 21세기 한국의 현실이 어떻게 겹쳐지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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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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