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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 딸도 예외없이 요즘 젊은이들이 전쟁보다 기후위기를 더 걱정한다. 미래가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당대에 지구가 생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배고픔과 가난 병과 전쟁이 삶을 위협하던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고민이다. 기후위기는 필연적으로 식량위기를 동반한다.
곡물이 자랄 땅이 사막화 되면서 경작지가 세계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말하면 딸들은 원시인처럼 아버지를 보겠지만 기후 위기를 고민하는 젋은이들에게 감이 얼마나 중요한 자산이었는지 전해주고 싶다.
어린 시절 동네엔 당시 산골 마을의 큰 수입원이었던 먹감 나무가 많았다. 전구처럼 둥근 감은 붉게 익을 무렵부터 먹물을 찍은듯 검은 얼룩이 생겼다. 단단해서 감장아찌를 담아도 쉽게 무르지도 않아 두고두고 밑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보리밥 도시락에 담겨 있던 노란 감장아찌는 산골 소년들의 추억이다. 인기많던 산내감은 버릴 것이 없이 팔려나가 동네 사람들은 감나무를 돈나무라 불렀다. 새파란 풋감부터 추석 즈음 살짝 볼이 발그레한 우림용감, 달디단 감홍시까지 돈이 되었다.
익지 않은 땡감(풋감)도 쓰임새가 많았다. 특히 뱃사공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목포에서 뱃사람들이 소구르마를 끌고 와서 가마니를 쟁여 사갔다. 감이 귀한 바닷가에서 우리 감은 뱃속이 든든한 간식이자 피로를 막아주는 약이었다. 배를 타고 오랫동안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 비타민C의 결핍을 막아 주었다. 소금물에 우려 떫은 맛을 걷어낸 우린 감은 쉽게 상하지도 않고 보관도 편했으니 일석삼조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그물을 무명으로 짰기 때문에 쪽대나 투망도 요즘으로 치자면 풋감물로 코팅해서 사용했다. 옷도 감물을 들여 지어 입으면 더러움도 덜하고 질겼다. 감물옷은 바닷가 모기나 해충도 꺼려해서 몸을 보호하는데 한몫을 했다.
우리집도 뒷산부터 백필리 안성대 매죽리까지 감나무가 많았다. 태인·신태인 미처 못가서 궁사리 좀 지나서 감상리에서 큰 항아리에 전문적으로 감을 우리는 곳이 있었다고 아버지는 지금도 기억하고 계신다. 감나무가 있는 집은 감꽃이 떨어지고 감이 탁구공만해지는 이맘때 음력 8월 전 밀금(선금)을 미리 받았다고 한다.
감나무는 산골의 큰 수입원이었다. 감만 전문적으로 따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 가을이면 약 20여일을 마을에 머물며 감을 땄다. 동네마다 감을 중개하는 거간꾼이 몇 명씩은 있었다. 현수씨 아버님, 인기씨 장인, 순창 양반이 밀금을 미리 주고 중개를 했다.
감도 풋감, 중시 늦감, 홍시 곶감 등 상품 종류가 다양했다. 곶감은 백접이 한동인데 수십동씩 곶감을 깍아 처마아래 매달아 말렸다. 물기가 말라가는 꼬들꼬들한 감을 빼먹는 재미가 아이들에게 솔찬했는데 돈으로 바뀔거라 좋은 곶감엔 손대면 혼이 났다. 알맞게 마른 곶감을 곱게 접어 싸리나무 가지에 10개씩 꽂아 10줄 한접 상품을 만들어 두었다. 곶감은 뽀얗게 분이 피었다. 설목까지 도보꾼들이 와서 곶감을 사가면 그해 감 일이 끝이 났다.
당시 도보꾼 들은 감을 사기위해 순창 사실재를 넘어왔다. 남자들은 지게에 바작을 얹어 감을 담았고 여인네들은 광주리에 감을 담아 머리에 이고 떠났다.
감이 팔려가던 고갯길을 지금은 모두 차를 타고 다닌다. 자동차가 집집마다 생긴지 불과 30년이나 되었을까? 지구 온난화 기후위기 시대라고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딸들을 보며 어른으로서 미안하다. 백년이 더 된 감나무엔 감들이 파랗게 매달려 있다. 천년의 먹거리 만년의 먹거리였던 감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바쁘게 편하게 살아가다 부닥친 기후위기 인류위기 앞에서 우리가 다시 되짚어 봐야 할 삶의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