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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눈] 문화 유산이 된 청회색 물결, 기후 변화 앞에서 위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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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기자

승인 : 2025. 09. 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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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개선문 주변의 전경./AF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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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방문한 여행자들은 도시를 덮은 지붕이 만든 청회색 빛 물결을 경험한다. 도시 지붕의 5분의 4를 덮고 있는 아연 성분 때문이다.

19세기 나폴레옹 3세는 당시 외젠 오쓰만 지사에게 파리 정비 사업을 지시했다. 비교적 저렴하고 성형하기 쉬운 아연이 새로운 건축자재로 도시에 대량 들어오면서 파리 건물의 옥상을 덮었다.

아연은 철보다 녹이 덜 슬어 유지와 보수에 용이하다. 또 비교적 가볍기 때문에 오래된 건물 위를 덮기에도 부담이 적고 물을 잘 흘려보내기 때문에 비가 잦은 파리에 적합한 건축 자재다. 아연 지붕의 회색빛은 파리의 석회암 건축물과도 잘 어울려 독특한 도시 풍경을 형성한다.

2024년에는 아연 지붕을 제작·설치·보수하는 기술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며 파리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인정받았다. 도시의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파리시는 엄격한 도시계획 규정을 두고 있다. 19세기 오쓰만 시대 건축물의 지붕 모양과 색상, 재질을 바꾸는 데 제한을 두며 복원·보수 시에도 원래와 같은 아연 지붕을 유지해야 한다.

파리시의 이런 노력은 기후 변화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아연 지붕은 더위에 취약하다. 2003년 유럽의 대폭염을 시작으로 파리의 여름은 매해 더 더워지고 길어지고 있다. 당시 폭염을 조사한 최근 연구 결과, 옥상 바로 아래 거주할 경우 사망 위험이 4배 이상 증가한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1970년대부터 이른바 "하녀방(chambres de bonnes)"으로 불리는 건물의 꼭대기 층은 한여름 내부 온도가 47도까지 올라간다. 지붕 표면 온도는 무려 67도까지 올라갔다. 아연으로 된 지붕이 더위 속에서 '오븐'처럼 작동해 밤에도 온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꼭대기 층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밤낮으로 더위와 싸워야 한다.

특히 꼭대기 층 가구는 지금도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해 학생이나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아연 지붕의 문제는 단순히 건축·문화유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파리 시청은 2050년까지 여름 평균 폭염 일수가 2~3배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파리 기후 적응계획을 수립했다. 또 프랑스 정부는 2022년부터 건축물 에너지·환경 규제(RE2020)를 제정해, 그해부터 새로 짓는 건축물에 단열 성능을 강화하고 여름철 과열 방지 조치를 의무화했다. 다만 파리 구도심의 기존 아연 지붕 건물에는 직접 적용이 어렵고 개·보수 시 일부 원칙을 반영하도록 유도했다.

파리시는 2030년까지 공공건물 옥상을 녹지로 바꾸고 폭염 쉼터를 늘리겠다고 했지만, 민간 건물까지 근본적으로 개선하기는 쉽지 않다.

문화유산과 기후 현실 사이에서, 파리가 도시의 청회색 빛 물결을 어떻게 지켜낼지 관심을 모은다.
이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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