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후반부터 공개 코미디 중흥 이끌고, 후배 양성 도맡아
말년에는 청도·남원 등을 돌며 현지 주민들 위한 공연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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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극단과 극장쇼 스타일의 과장된 슬랩스틱 코미디가 주류를 이루던 1970년대 초반, 고인은 또래의 고영수와 함께 재기발랄하고 엉뚱한 입담으로 '토크 코미디'의 출발을 알렸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같은 변화의 과정에서 전유성은 구봉서·서영춘·배삼룡 등 코미디언으로 통칭되던 선배 희극인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구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개그맨'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어눌한 듯한 말 솜씨에 무표정과 어색한 몸짓으로 일관하는 연기력은 뛰어난 아이디어의 소유자인 전유성을 오랫동안 만년 조연의 자리에 머물게 했다. 일례로 지금의 중장년층 시청자에게 그에 대한 기억을 묻는다면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되지 않을까 싶다. 1980년대 중후반 최고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쇼 비디오 자키'의 '네로 25시'에서 목석처럼 서 있다 "애는 무슨 말을 못하게 해" 단 한마디만 내뱉던 모습 그리고 '유머 일번지'의 '남 그리고 여'와 '청춘을 돌려다오'에서 까불대는 최양락과 임하룡 옆에서 난감해하던 얼굴이 전부일 것이다. 이처럼 큰 웃음에 따른 스포트라이트는 모두 후배들의 차지였고, 본인은 그림자로 남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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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부 기자 생활 초창기, 주요 출입처인 서울 여의도 KBS2 별관 '개그 콘서트' 녹화장에서 곧잘 마주하던 전유성의 미소가 떠오른다. '전유성을 웃겨라'란 제목의 코너가 생길 정도로 웬만해선 웃지 않는 고인이었지만, 무대 위 한참 어린 후배들의 연기를 보면서는 특유의 어색한 듯한 파안대소를 자주 터트리곤 했다. 하지만 어렵게 말을 건네면 금세 뚱한 표정으로 돌아와 어디론가 사라지는 통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부고 소식을 접하고 '그때 더 살갑게 다가가 코미디와 관련해 더 많은 걸 물어보고 배웠더라면 어땠을까' 진한 아쉬움이 드는 이유다.
공연 예술 종사자들의 '뒷것'을 자처했던 고(故) 김민기처럼, 전유성은 희극인들의 믿음직한 '뒷배'로 살았다. 그 '뒷배'를 맞이한 천상은 웃음으로 가득하겠지만, 우리는 당분간 웃을 일이 없을 것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