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조성준기자의 와이드엔터] 한국 코미디의 ‘뒷배’를 떠나보내며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50927010014899

글자크기

닫기

조성준 기자

승인 : 2025. 09. 28. 11:45

25일 타계한 전유성은 아이디어 보고였지만 만년 조연 자처해
90년대 후반부터 공개 코미디 중흥 이끌고, 후배 양성 도맡아
말년에는 청도·남원 등을 돌며 현지 주민들 위한 공연 선보여
개그콘서트 무대에 전유성 영정<YONHAP NO-5364>
2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S 신관 '개그콘서트' 녹화 스튜디오에서 개그맨 전유성 노제가 엄수되고 있다./ 연합뉴스
28일 발인을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 새로운 웃음 둥지를 튼 고(故) 전유성이 한국 희극사에 남긴 족적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깊고 크다.

유랑극단과 극장쇼 스타일의 과장된 슬랩스틱 코미디가 주류를 이루던 1970년대 초반, 고인은 또래의 고영수와 함께 재기발랄하고 엉뚱한 입담으로 '토크 코미디'의 출발을 알렸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같은 변화의 과정에서 전유성은 구봉서·서영춘·배삼룡 등 코미디언으로 통칭되던 선배 희극인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구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개그맨'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어눌한 듯한 말 솜씨에 무표정과 어색한 몸짓으로 일관하는 연기력은 뛰어난 아이디어의 소유자인 전유성을 오랫동안 만년 조연의 자리에 머물게 했다. 일례로 지금의 중장년층 시청자에게 그에 대한 기억을 묻는다면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되지 않을까 싶다. 1980년대 중후반 최고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쇼 비디오 자키'의 '네로 25시'에서 목석처럼 서 있다 "애는 무슨 말을 못하게 해" 단 한마디만 내뱉던 모습 그리고 '유머 일번지'의 '남 그리고 여'와 '청춘을 돌려다오'에서 까불대는 최양락과 임하룡 옆에서 난감해하던 얼굴이 전부일 것이다. 이처럼 큰 웃음에 따른 스포트라이트는 모두 후배들의 차지였고, 본인은 그림자로 남기 일쑤였다.

개그맨 전유성 마지막 무대<YONHAP NO-5412>
개그맨 이홍렬이 2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S 신관 '개그콘서트' 녹화 스튜디오에서 엄수된 개그맨 전유성 노제에서 영정을 운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전유성의 '르네상스맨'적인 기질은 1990년대 후반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상파에서 콩트 코미디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자 김미화 등과 손잡고 대학로 무대 공연의 형식을 빌려온 '개그 콘서트'의 산파 역할을 맡아 공개 코미디의 전성기를 선도한데 이어, 컴퓨터 입문 서적 등 다채로운 저술 활동을 병행하며 교육자로도 변신해 강단에서 김신영·조세호·황현희 등 여러 후배들을 양성했다. 또 말년에는 경북 청도와 전북 남원 등 지자체와의 협업을 통해 해당 지역 주민들을 위한 상설 공연을 선보였고, 재능 기부 수준의 돈만 받고도 흔쾌히 지방 축제의 컨설팅 제의를 받아들이는 등 진짜 어른다운 행보를 보여줬다.

연예부 기자 생활 초창기, 주요 출입처인 서울 여의도 KBS2 별관 '개그 콘서트' 녹화장에서 곧잘 마주하던 전유성의 미소가 떠오른다. '전유성을 웃겨라'란 제목의 코너가 생길 정도로 웬만해선 웃지 않는 고인이었지만, 무대 위 한참 어린 후배들의 연기를 보면서는 특유의 어색한 듯한 파안대소를 자주 터트리곤 했다. 하지만 어렵게 말을 건네면 금세 뚱한 표정으로 돌아와 어디론가 사라지는 통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부고 소식을 접하고 '그때 더 살갑게 다가가 코미디와 관련해 더 많은 걸 물어보고 배웠더라면 어땠을까' 진한 아쉬움이 드는 이유다.

공연 예술 종사자들의 '뒷것'을 자처했던 고(故) 김민기처럼, 전유성은 희극인들의 믿음직한 '뒷배'로 살았다. 그 '뒷배'를 맞이한 천상은 웃음으로 가득하겠지만, 우리는 당분간 웃을 일이 없을 것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조성준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