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NBA의 데이터 활용, K리그·KBO의 OTT 실험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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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팀의 승패가 당일의 감정을 좌우한다면, 데이터와 디지털 전환은 그 다음 날의 투자와 다음 시즌의 설계를 바꾼다. 스포츠가 감동의 산업이라면, 그 감동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언어는 이제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가깝다. 승부의 세계였던 스포츠가 점차 분석과 예측의 세계로도 확장되는 이유다.
◇ 글로벌 빅리그가 증명한 디지털 전환의 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는 경기력 데이터를 새로운 언어로 만들었다. 예전에는 점유율이나 슈팅 수처럼 단순한 수치가 전부였다면, 이제는 압박 강도, 라인 간 간격, 전환 속도, 공간 점유율 같은 복합 지표가 해설자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예컨대 중계진이 "전반보다 후반의 전환 속도가 12% 빨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데이터다.
이는 단순히 감독의 전술 수정이나 교체를 돕는 수준을 넘어, 방송사의 그래픽 자료가 되고, 베팅 시장과 팬 커뮤니티의 콘텐츠가 되며, 결국에는 새로운 수익원으로 이어진다. 데이터는 이제 경기장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리그 전체가 유통하고 판매하는 '상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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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팬은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데이터 생산자가 된다. 클릭과 시청, 공유와 댓글이 모두 데이터로 축적돼 다시 구단의 마케팅 전략에 반영된다. 데이터가 데이터를 낳는 '재투자 루프'가 완성되는 셈이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는 '스탯캐스트'라는 시스템으로 새로운 문법을 열었다. 타구의 속도와 회전수, 발사각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기술은 팬에게는 재미있는 시청 포맷이 되고, 구단에는 스카우팅과 선수 관리의 근거 자료가 된다.
이 데이터는 판타지 리그와 합법 스포츠베팅, 미디어 해설, 코칭 툴로 파생돼 리그 전체의 체류 시간을 늘린다. 나아가 MLB가 직접 운영하는 OTT 'MLB.TV'와 결합하면, 콘텐츠와 데이터, 구독이 하나의 선순환 고리를 만든다.
NFT와 블록체인은 수집의 문법을 디지털로 이식했다. NBA의 '탑 샷(Top Shot)'은 한정판 하이라이트 영상을 NFT로 발행해 수억 달러의 거래를 기록했고, 라리가와 세리에A는 공식 디지털 카드 플랫폼 '소레어(Sorare)'와 협업해 선수 카드를 글로벌 시장에 내놓았다. 시장의 거품과 조정기를 거쳤지만, 디지털 머천다이즈가 보조 수익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팬들이 단순히 경기를 '보는 것'을 넘어, 경기의 일부를 '소유한다'고 느끼는 방식은 스포츠 경험의 또 다른 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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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스포츠는 OTT에서 변화를 먼저 체감했다.
K리그는 쿠팡플레이와의 독점 계약을 통해 새로운 실험에 나서고 있다. 단순한 플랫폼 교체를 넘어, 시청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축적·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접속 시점·체류 구간·클립 공유 등 시청 행태 데이터가 (개인정보 보호 규정 범위 내에서) 누적되면, 팀·경기 유형별 콘텐츠 선호와 지역·세그먼트별 확산 양상을 가늠할 수 있다. 이렇게 축적된 데이터가 캠페인 타깃팅이나 알림 전략 같은 마케팅 의사결정으로 이어지고, 다시 시청을 유도하는 흐름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프로야구 KBO 역시 티빙(TVING)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중계-하이라이트-분석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계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경기 종료 뒤 핵심 장면 요약과 분석 콘텐츠의 제공 속도를 높이고, 선수별 타격·투구 지표를 앱에서 쉽게 탐색하도록 서비스가 고도화되는 분위기다. 팬은 이러한 요약본을 SNS로 공유하며 대화를 확장하고, 구단은 티켓·굿즈·회원권과 연계된 CRM을 통해(개인정보 보호 규정 범위 내에서) 팬 세그먼트를 더 세밀하게 읽을 수 있다. 티켓 구매·굿즈 결제·앱 이용 기록과 영상 소비가 단일 고객 ID로 통합될 경우, '팬 한 명의 연간 가치(LTV)'를 보다 정밀하게 추정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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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후반 20분 이후 특정 구역에서 퇴장이 집중되는 패턴이 발견된다면, 해당 시간대에 맞춘 푸시 알림이나 할인 쿠폰 제공을 통해 체류 시간을 늘리는 전략을 시도해볼 수 있다. 감독이 전술을 교체하듯, 운영 방식이 실시간으로 조정되는 시대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 데이터 지도의 세 축
스포츠 산업에서 무엇을 데이터화할 수 있는가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경기력 데이터다. GPS와 센서, 비전AI 등을 통해 위치·속도·부하 지표가 수집되면서 선수의 움직임이 수치로 환원된다. 단순히 많이 뛰었는지를 기록하는 차원을 넘어, 이러한 데이터는 경기력의 세부적 패턴을 드러내는 기초가 된다. 머신러닝을 활용해 특정 움직임의 득점 기여 가능성이나 부상 위험도를 경기·훈련 맥락에서 추정하는 시도가 확대되고 있고, 이를 통해 경기 운영을 최적화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압박이나 전환, 2차 볼 회수 같은 세부 이벤트도 데이터화되면서, 경기력의 배경이 수치로 설명될 수 있는 기반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둘째는 팬 데이터다. 티켓 구매, 앱 사용, 콘텐츠 소비, 현장 체류, 굿즈 결제와 SNS 활동까지 팬의 여러 움직임이 기록된다. 이를 통해 구단은 단순한 관중 수치를 넘어 팬의 충성도를 가늠할 수 있다. 같은 3만 명의 관중이라도 재방문율, 평균 소비액, 구독 전환율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러한 데이터가 있어야 팬 경험의 질을 세밀하게 높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셋째는 상업 데이터다. 스폰서 로고가 화면에 노출된 시간, 관중의 시선이 머문 방향, 광고 노출이 SNS를 거쳐 실제 구매로 이어진 비율 같은 수치가 스폰서 가치의 근거가 된다. 과거에는 단순히 '노출됐다'는 사실만 강조됐다면, 이제는 언제·어디서·어떻게 노출돼 소비로 이어졌는지가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 세 가지 데이터는 서로 맞물린다. 경기력이 좋아지면 승률이 높아지고, 승률은 팬의 체류 시간을 늘리며, 체류 시간은 스폰서 가치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발생한 수익이 다시 경기력과 팬 경험에 투자되는 선순환 구조가 작동할 때, 데이터는 비로소 산업화의 엔진 역할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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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의 본령은 관람 방식의 변화다. 이제는 멀티앵글과 즉시 리플레이, 개인화된 하이라이트가 기본이 됐다. 여기에 AR 그래픽으로 슛의 궤적과 패스 라인을 확인하고, 모바일 전용 카메라로 선수의 시점과 벤치의 반응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메타버스 공간에서는 경기 전후 팬 밋업이 열리고, 관람·대화·거래가 한 화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전반 종료와 동시에 앱이 "방금 장면을 테마 카드로 소장하시겠습니까?"라고 묻고, 팬이 소액 결제로 디지털 기념품을 구매하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그 구매 기록은 다음 경기의 혜택으로 연결된다. 수집이 끝이 아니라, 다음 경험의 시작인 셈이다.
현장의 몰입도 강화된다. 좌석별 초근접 리플레이, 실시간 토크 채널, 하프타임 AR 게임, QR코드로 받는 즉석 경품이 팬을 단순한 시청자가 아닌 참여자로 만든다. 팬의 참여는 곧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는 다시 더 나은 참여를 낳는다.
◇ 구단 경영의 변화: 데이터가 조직을 바꾼다
데이터는 구단의 조직 구조까지 흔든다. 경기력을 다루는 퍼포먼스 부문에는 데이터 과학자와 스포츠 과학자가, 팬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부문에는 CRM 매니저와 마케팅 기술 담당자가, 스폰서를 맡는 부문에는 분석가와 리서처가 새로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분석 자체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현장에 적용되느냐다. 좋은 모델이라도 라커룸과 벤치, 매표소와 앱 푸시까지 흘러들지 못한다면 무의미하다. 그래서 데이터팀 옆에는 현장 적용을 전담하는 프로젝트 매니저가 자리한다.
가격 정책도 변화하고 있다. MLS에서는 클럽 단위로 동적 요금제가 활용되고 있고, LAFC는 2019년부터 자체 '실시간 동적 가격' 툴을 운용해 대진·요일·날씨·좌석 시야·수요 예측 등을 반영해 1차 판매가를 조정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체계가 작동하는 환경에서는 스타 효과가 곧바로 가격에 투영된다. 손흥민의 LAFC 이적 이후 일부 홈 경기는 공식 발매가가 평소보다 높게 책정된 사례가 있었고, 2차(리셀) 시장에서는 최저가가 수 배로 뛰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즉, 구단의 동적 가격 조정과 수요 집중, 리셀 시장의 프리미엄이 겹치면서 팬이 체감하는 가격 상승 폭이 커진 것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암표 이미지가 여전히 강하고, 가격 변동에 대한 팬들의 민감도가 높아 동적 요금제 도입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초기에는 팬들의 반발을 살 수 있지만, 상한선 설정과 멤버십 보호 규칙을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제도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제도가 안정적으로 자리잡는다면 구단은 총수입을 높일 수 있고, 팬 역시 합리적인 기준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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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에는 리스크도 적지 않다. 개인정보 보호와 선수 데이터 권리 문제가 대표적이다. 선수의 부상 위험과 회복 지표, 수면 패턴 같은 민감한 데이터는 인사 정보에 가깝다. 선수협과의 합의가 선행되지 않으면 상업화 과정에서 충돌이 불가피하다.
NFT와 같은 디지털 자산은 시장 변동성이 크다. 거래량 급감과 회계·과세 문제, 자금세탁 방지 규정은 현실적 장벽이다. NFT를 단순히 고가의 재판매 시장으로 유도하기보다는, 경기장 입장 기록이나 현장 참여 보상과 연계하는 방식이 더 현실적이다.
인프라 격차도 크다. 경기장의 네트워크 품질, 좌석 내 전원, 데이터 관리 체계는 수도권과 지방, 대형 구단과 중소 구단 사이에 차이가 크다. 리그 차원의 공동 플랫폼과 표준화 작업이 필요하다. 알고리즘의 투명성도 문제다. 팬이 자신의 데이터 열람·삭제 권리를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프라이버시 대시보드 같은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 미래는 데이터 위에, 감동은 현장 위에
스포츠는 여전히 현장의 공기와 소리에서 감동을 얻는다. 그러나 그 감동을 내일로, 다음 시즌으로 운반하는 수단은 데이터와 디지털 플랫폼이다. 팬의 열광이 데이터로 기록되고, 그 데이터가 더 나은 경험과 수익으로 환원될 때, 우리는 비로소 '감동의 경제학'을 실감한다.
한국 스포츠가 글로벌 시장의 언어로 말하려면 디지털 전환을 전술이 아니라 철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작은 파일럿이라도 빠르게 시작하고, 측정하고, 개선하는 과정을 꾸준히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산업을 바꾸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