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7세…"불길·총성·시신…나는 모든 것을 봤다"
학살 이후 떠돌이 생활…"미래가 사라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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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몽로 니컬스 털사 시장은 24일(현지시간) 플레처의 별세 소식을 알리며 "플레처는 누구보다 큰 고통을 감내했지만 생애 전체를 희망의 길을 밝히는 데 바쳤다"고 애도했다.
대학살은 1921년 5월 31일 밤, 경찰의 무장을 지원 받은 백인 폭도들이 흑인 경제 중심지로 '블랙 월 스트리트'로 불린 그린우드 지역을 급습하며 시작됐다. 19세 흑인 구두닦이가 백인 여성 승강기 운전사를 성추행했다는 허위 주장에 분노가 증폭된 결과였다.
이틀간 약 300명이 숨지고, 수천 명이 집을 잃었다. 일부 생존자들은 비행기에서 투하된 불폭탄까지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7살이던 플레처는 2021년 미 의회 청문회에서 "검은 시신들이 거리에 널렸고, 총성이 울렸으며, 도시는 불길에 휩싸였다"며 "그날 이후 매일을 그 학살과 함께 살았다"고 말했다.
플레처는 2020년 당시 동생 휴즈 반 엘리스, 또 다른 학살 생존자 레시 베닝필드 랜들과 함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오클라호마주 고등법원은 2024년 6월에 이를 기각했다. 소송인들의 피해가 주법에 따른 공공의 해악 피해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법적 책임은 무산됐지만, 털사시는 지난 6월 장학금·창업 지원·역사 보존 사업 등을 위해 1억500만달러 규모의 민간 신탁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시 정부 차원에서 마련된 첫 실질적 배상 시도다.
1914년 오클라호마주 코만치에서 태어난 플레처의 가족은 학살 직후 마차에 올라 털사를 떠났다. 당시 거리에는 시신이 쌓여 있었다고 그는 2023년 회고록 '내 이야기를 묻지 마라(Don't Let Them Bury My Story)'에서 적었다.
소작농 일을 찾아 여러 지역을 전전했고, 삶은 빈곤과 노동의 연속이었다. 학업은 초등학교 4학년에서 멈췄다.
십대 후반에는 털사로 돌아와 잡화점에서 일했고, 1932년 결혼 후 2차 대전 때 캘리포니아 조선소에서 용접 보조로 일했다. 전쟁 이후 남편과 헤어지고 세 자녀를 홀로 키우며 85세까지 생계를 위해 일했다.
플레처는 언론 인터뷰와 의회 증언에서 "그날의 공포가 평생 따라다녔다"며 "나라가 잊어도 나는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