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중국 사이의 고육책, '비싼 자립' 경제안보 선택 가능성
보호무역 논란·경쟁력 훼손 우려 속 EU·산업계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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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5일(현지시간) 유럽이 이 규칙을 통해 '메이드 인 유럽'을 앞세워 산업과 자율성을 지키려 하지만 실용성과 보호무역 논란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 '바이 유러피언'의 딜레마, 자립인가 보호무역인가
프랑스 베르코르 사례, '메이드 인 유럽'의 상징과 현실적 한계
프랑스 스타트업 베르코르(Verkor)는 됭케르크 인근의 기가팩토리에서 전기차 배터리가 생산되기 시작할 때, 이 제품에 '메이드 인 유럽' 태그가 붙기에 적합하길 원하고 있다. 지금은 배터리 구성 요소의 절반 이상은 아시아에서 공급되고 있는데, 베르코르는 흑연·양극재·전해질 등 원재료의 60~70%를 유럽산으로 전환하는 현지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회사 측은 흑연·양극재·전해질이 이미 유럽에 존재한다며 이미 현지화로의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FT는 베르코르가 유럽의 신생 배터리 산업과 프랑스 재산업화의 큰 희망으로 주목받고 있다며 이 기업이 EU가 제조업 기반을 구제하기 위해 추진하는 새로운 노력의 상징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다만 비판론자들은 이러한 접근이 비용 상승·경쟁력 훼손·무역 파트너 소외라는 위험을 동반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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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집행위원회는 이번 달 국방·디지털·산업 부문 전반의 공공 계약에서 유럽산 제품을 우선시하는 가장 야심찬 제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 핵심 법안인 산업 가속화법은 재생에너지·배터리·자동차 등 특정 전략 기술이 정부 보조금 혜택을 받기 위해 갖춰야 할 유럽산 부품의 함량 목표를 설정하고, 외국인 직접 투자자가 지적 재산을 이전하고 현지 노동자를 고용해야 한다는 조건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EU 내 2조유로 규모의 공공 조달을 EU 산업으로 대거 전환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시도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변덕스러운(volatile) 무역 어젠다도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한다고 FT는 전했다.
◇ EU 집행위 "유럽 독립, 의존보다 비용 적다"
이러한 '유럽산 구매' 규칙의 지지자들은 높은 에너지 가격과 중국·남아시아 저가 제품과의 경쟁 속에서 이것이 EU의 2조5800억유로 규모 제조업의 점진적 침식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스테판 세주르네 EU 집행위 번영·산업전략 담당 수석부위원장은 "유럽의 독립에는 비용이 따르지만, 그 비용은 의존으로 인한 비용보다 훨씬 적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의 '메이드 인 차이나', 미국의 '바이 아메리칸', 캐나다의 '바이 캐나디언'을 예로 들며 유럽도 유사한 체계를 갖춰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세주르네 팀이 작성한 이러한 내용의 기고문은 15개국 신문에 실렸고, 1000명 이상의 유럽 최고경영자(CEO)가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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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규칙의 구성은 치열한 내부 논쟁의 대상이 되면서 입법이 이미 두 달 이상 지연됐다. 논쟁의 중심은 '메이드 인'과 '유럽'의 정의, 특정 섹터의 우선순위 설정, 포함 국가 범위, 그리고 비용 상승을 피하는 방법이다.
EU 정상들은 이번 달 공식 발표에 앞서 오는 12일 경쟁력을 주제로 한 비공식 정상회의에서 이 정책을 논의할 계획이다.
반대 진영은 이 법안은 '보호무역주의를 향한 명백한 추진'이라고 비판한다. 벤자민 두사 스웨덴 통상장관은 기업에는 전 세계에서 최고의 부품이 필요하다며 EU의 공급 전략 제한으로는 부유해질 수 없으며, 경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대표적 EU 정책 싱크탱크인 유럽정책연구센터(CEPS)의 카렐 라노 CEO는 이 정책이 단일시장에 반한다고 비판했다.
◇ 프랑스의 '주권' 구상, 트럼프·전쟁 만나 현실로
FT는 '바이 유러피언' 구상이 프랑스에서 10년 이상 축적돼 왔다고 설명했다. 특히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의 에너지·안보 의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중국 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유럽 대륙의 구조적 취약성을 부각시켰다.
코로나19 팬데믹은 EU 정부들이 의약품 원료부터 고무장갑까지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은 유럽이 산업 회생과 자율성을 지지해야 한다는 요구를 더욱 강화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달 20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덴마크령 그린란드 '매입' 주장과 EU산에 대한 관세 인상 예고 등 '지진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새로운 형태의 유럽 독립성"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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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핀란드·아일랜드·포르투갈·체코·라트비아·에스토니아·몰타 등 8개 EU 회원국은 '유럽산 우선'이 '최후의 수단(last resort)'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U의 무역 파트너들의 반발도 거세다. 60년 이상 EU에서 생산해 온 일본 완성차 업체 혼다는 '메이드 인 유럽'을 '공통의 가치로 만들어진 것(made with common values)'으로 정의할 것을 촉구하면서 혼다는 과도한 현지화 요건이 유럽 제조업을 반드시 강화하지는 않는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행정부도 자국 기업이 차별받는다고 판단할 경우 관세 전쟁을 재점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미국 외교관들이 내다봤다.
◇ '비용 상승' 감수하고 경제 안보 택하나
정책 지지자들조차 이 정책이 비용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유럽 내 배터리 제조 비용은 중국보다 최대 60% 높을 수 있다.
다만 글로벌 회계·컨설팅업체 딜로이트가 2024년 9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저탄소 강철을 사용할 경우 도요타의 중형 자동차 가격을 0.7% 인상하는 데 그치는 등 일부 지속 가능한 제품의 비용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베노아 르메냥 베르코르 CEO는 '유럽 내 공급망 재편'이 비용을 조금 올릴 수는 있지만, 경쟁력 있는 가격의 유럽산 양극재 생산이 이미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FT는 이 논쟁이 단기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유럽의 제조업 기반과 경제 안보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라고 해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