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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알아도 못 데려와”… ‘외교의 벽’에 가로막힌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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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훈 기자

승인 : 2026. 04. 20. 17:47

'유명무실' 범죄인 인도조약
대통령 요청 3주 만에 속전속결 송환
'마약왕 박왕열' 사례는 극히 이례적
소녀상 말뚝 테러 등 수년째 제자리
국가 간 협상 속 재판 지연·처벌 공백
협의 전담부서 신설 등 제도 보완 시급

필리핀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마약왕 박왕열'이 지난달 전격 국내로 송환된 것은 범죄인 인도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정상 간 직접 요청이 오간 지 약 3주 만에 이뤄진 '속전속결' 송환은 정치·외교 채널이 작동할 경우 절차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예외에 가깝다. 평화의 소녀상 '말뚝 테러' 피의자나 쿠팡 개인정보 유출범처럼 자국 보호 논리나 정치적 사유가 개입된 사건은 수년 넘게 발이 묶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범죄인 인도조약의 실제 집행은 외교 관계와 각국 이해에 좌우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20일 법무부에 따르면 범죄인 인도조약은 대한민국과 외국 간 범죄인 인도를 위해 체결된 조약·협정 등의 합의를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1990년 9월 5일 호주와의 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올해 4월 기준 82개국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있다. 다만 범죄인 송환은 양국 간 조약만으로 자동 집행되는 절차가 아니다. 각국의 법률 체계 차이, 현지 수사·재판 진행 여부 등 다양한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

이 같은 제도적 한계 속에서 피의자가 해외에 머무는 동안 재판이 멈추거나 지연되고, 일부 사건은 사실상 처벌 공백 상태에 놓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는 평화의 소녀상 '말뚝 테러' 사건이다. 일본 정치인 스즈키 노부유키는 2012년 6월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고 적힌 말뚝을 묶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는다.

스즈키는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2013년 9월 첫 공판 이후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출석하지 않았다. 일본에 체류 중인 점이 장기 불출석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특히 재판부는 스즈키의 일본 내 주소지로 소환장이 적법하게 송달된 사실을 확인했지만, 피고인 없이 재판을 진행하는 궐석재판으로도 절차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자 재판부는 공판기일마다 피고인 출석 여부와 검찰 측 의견을 확인한 뒤 기일을 연기하고 있다. 법무부도 2018년 일본 법무성에 스즈키에 대한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지만, 현재까지 별다른 회신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범죄인 인도가 지연되거나 무산되는 사례는 일본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건의 핵심 피의자로 지목된 중국 국적 전직 직원 A씨의 국내 송환이 난항을 겪고 있다. 이 사건은 지난해 11월 쿠팡이 개인정보 유출 피해를 확인해 경찰에 신고하면서 불거졌다. 경찰은 A씨를 입건하고 인터폴 사무총국에 적색수배(위치 확인과 체포 협조)를 요청했지만, 중국 측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사실상 송환이 어려운 상황이다.

배임 혐의로 징역 5년형이 확정된 선종구 전 하이마트 회장은 수년째 도피 행각을 벌이고 있다. 선 전 회장은 하이마트 매각 과정에서 회사에 수천억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고, 대법원 파기환송 이후 파기환송심, 재상고심 끝에 유죄가 확정됐다.

그러나 선 전 회장은 확정 판결이 내려진 2021년 8월 해외로 출국했고, 현재 캄보디아에서 체류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캄보디아 측은 선 전 회장에 대한 범죄인 인도 청구 조건으로, 한국에 체류 중인 캄보디아 반정부 인사에 대한 송환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KH그룹 계열사에 4000억원대 손해를 끼치고, 650억원가량 계열사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2022년 검찰 조사를 받다가 같은 해 해외로 도주한 배상윤 KH그룹 회장 역시 4년째 귀국하지 않고 있다. 배 회장의 도피가 장기화하자 피의자 부재로 수사와 재판은 장기간 공전하고 있다.

일선 수사 현장에서는 범죄인 인도조약이 '유명무실'한 제도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순간 송환 절차는 협상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그사이 사건은 지연되며 책임자 처벌은 물론 피해 회복도 멈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외교부나 수사기관에 국가 간 협의를 전담하는 부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수도권의 한 차장검사는 "캐나다로 도주한 피의자를 송환하는 과정에서 현지 당국으로부터 국내에 체류 중인 캐나다 범죄자 인도를 요청받은 적이 있다"며 "해외 도피범 검거는 결국 양국 간 물밑 협의 등 외교적 노력이 병행될 수밖에 없어 송환 절차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법무부 관계자도 "범죄인 인도는 사법적 심사와 외교적 노력이 결합된 절차로, 양국 중앙기관 간 긴밀한 협의가 필수적"이라며 "협의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수반된다"고 밝혔다.
정민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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