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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대로] 신현송號 한은, ‘유연한 거인’보다 ‘규칙 수호자’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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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4. 27. 18:03

유연함이 독이 된 금융위기
'빅 플레이어'가 만드는 불확실성
불확실한 세계에서 '규칙'의 중요성
김이석고문
김이석 논설고문
세계적인 경제학자 신현송 교수가 한국은행 총재로 취임했다. 그의 국제결제은행(BIS)과 학계에서 쌓은 명성 덕분에 그가 한국 경제의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낼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지난 21일 열린 취임사에서 신 총재는 오늘날의 세계 경제를 지정학적 갈등과 AI 기술 혁명이 맞물린 '대전환기'로 진단하며, 전통적인 '물가 안정'의 틀을 넘어선 '금융 안정'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특히 그는 중앙은행의 역사가 환경 변화에 대응하며 끊임없이 진화해 온 과정임을 강조하며, 기존에 정립된 이론을 따르기보다는 실천을 통해 새로운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신 총재가 강조한 '신중하고 유연한 통화정책'과 '새로운 시각의 금융 안정'이라는 포부는, 인간이 직면한 근본적인 무지와 불확실성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관점에서는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 오드리스콜(Gerald P. O'Driscoll, Jr)과 리조(Mario J. Rizzo)는 2008년 국제 금융위기를 외부 충격에 의한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중앙은행의 재량적 개입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자본 오배분(malinvestment)'의 결과로 분석하기 때문이다.

신 총재는 취임사에서 중앙은행이 대공황과 스태그플레이션을 거치며 진화해 왔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 안정이 핵심 책무로 더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학파는 2008년 위기의 본질이 중앙은행의 인위적인 저금리 정책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중앙은행이 신용을 팽창시켜 이자율을 실제 저축 수준보다 낮게 유지할 때, 기업가들은 이를 시간선호의 변화로 오인한다. 그 결과 자원을 더 먼 미래를 겨냥한 장기 프로젝트나 위험한 프로젝트에 과도하게 투자하는 '자본 오배분' 현상이 발생하고 이것이 결국 경제 위기의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위험의 종류와 확률을 미리 알 수 있다고 전제하는 리스크 모델이 '나이트형 불확실성(Knightian uncertainty)'에 물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고 지적해 왔다. 그러나 금융 당국 등은 정교한 '리스크 모델'에 의존해 시장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 총재가 제시한 '시장 가격지표를 활용한 조기경보 기능 강화'나 '비전통 금융상품으로의 분석 범위 확장'은 신용 팽창이 그림자 금융처럼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자칫 중앙은행이 모든 것을 예측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구성주의적 오류(constructivist fallacy)'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

오스트리아 학파가 가장 경계하는 대목은 중앙은행이 시장의 '빅 플레이어'로 군림하며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뒤흔드는 상황이다. 신 총재는 시장과의 소통과 유연한 대응을 약속했지만, 역설적으로 중앙은행 총재의 '유연한' 판단과 행보 자체가 민간 경제 주체들에게는 가장 큰 불확실성의 원천이 될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개별 경제 주체들은 자신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타인의 행동을 예측해야 한다. 그런데 이윤과 손실의 규율을 받지 않는 중앙은행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원칙을 바꿀 때, 시장 참여자들은 시장에 내재된 불확실성에 대응하기도 바쁜데 총재의 성향과 판단을 추측하는 데 에너지를 쏟게 된다. 중앙은행이 '유연함'을 발휘할수록,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에서 기댈 수 있는 '이정표'를 잃게 된다.

신 총재는 원화의 국제화,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인프라 구축, 구조개혁에 대한 적극적 역할 등 한국 경제가 나아갈 원대한 과제들을 열거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학파는 중앙은행이 이처럼 많은 영역에 개입하려 할수록 통화의 공급이 '안정적인 규칙'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음을 깊이 우려한다. 과거 연방준비제도(Fed)의 역사를 돌이켜봐도, 성과가 좋았던 시기는 중앙은행이 무한한 독립성을 누릴 때가 아니라 금본위제나 테일러 준칙(Taylor Rule)처럼 스스로를 엄격한 '규칙' 속에 가두었을 때였다.

안정적인 규칙은 중앙은행을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보호할 뿐만 아니라, 민간 주체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응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토대'를 제공한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불변의 규칙을 제공해 준다면, 경제 주체들은 그 틀 안에서 스스로 지식을 발견하고 더 큰 혼란 없이 적응해 나갈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중앙은행의 진정한 소임은 변화무쌍한 상황에 매번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통화 공급의 규칙을 만들어내고 이를 엄격히 지켜나가는 것에 있다.

신 총재가 언급한 '변화된 환경에 맞는 거시건전성 체계'가 만약 변화된 환경에 맞는 새로운 통화 규칙을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사례별로 개입하는 '편의주의(Expediency)'의 또 다른 이름이라면, 이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오히려 해칠 수 있다. 경제가 정체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임을 인정한다면, 중앙은행은 그 안에서 개인들이 자유롭게 계획을 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안정적인 틀을 확립하는 데 주력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이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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