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오페라하우스가 2026년 기획으로 선보인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는 '2026 한·중·일 문화교류의 해'의 일환으로 대구오페라하우스와 중국 국가대극원(NCPA)이 공동 제작한 작품이다.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개막작을 4년 연속 연출한 유일한 연출가이자, 현재 제네바 국립극장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인 세계 정상급 융복합 연출가 다비데 리베르무어의 연출로 아시아에서는 초연됐다. 개막 전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던 이 작품은 24, 25일 양일 공연이 모두 매진 됐다고 한다.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리골레토'를 공연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이 특별했던 이유는 한중 합작이자, 연출가의 명성과 아이디어에 대한 궁금증 때문일 것이다. 특히 초대형 LED 디지털 캔버스가 무대에 세워질 것이라는 소식은, 오페라라는 오래된 유산과 첨단 기술의 결합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하는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미디어 아트를 무대장치나 배경으로 활용한 오페라를 종종 봐왔으나 이번 '리골레토'와 같이 압도적 시각 효과가 음악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무대는 처음인듯하다. 지난 24일 공연에서 1막 공작의 궁정은 요지경 속 그것처럼 화려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로 채워졌다. 영상으로 프로젝션 맵핑 됐는데 세련된 색감과 섬세한 화면구성이 실제 16세기 바로크 시대의 궁전이나 교회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질다의 첫 아리아에서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들이 온 벽면을 덮어나가는 이미지도 곡의 내용과 인물 캐릭터 등 작품 맥락과 딱 맞아떨어지는 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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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오페라하우스가 선보인 오페라 '리골레토'의 한 장면. /대구오페라하우스
무대의 영상은 사실적 분위기와 상징적 장치를 분주히 오가며 작품의 완성도를 이끌었지만, 영상 효과에만 의존한 건 아니었다. 1막 2장, 리골레토의 집 장면에서는 천장에 매달린 거울을 통해 사랑하면서도 서로를 속이고, 기만하는 부녀의 모습을 관객들만 볼 수 있게 했고, 4막에서는 가림판 같은 장치 하나로 스파라푸칠레의 여관에서 결말로 이어지는 극적인 장면을 영리하게 살렸다.
리베르무어 연출의 시각적 영향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인지 성악가가 중심인 이 오페라의 특징이 강렬한 무대 세트와 장치, 영상, 의상, 조명 등이 주동하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재편되는 인상을 받았다. 호화롭고 웅장한 배경 아래, 인물들은 하잘것없는 존재처럼 묘사돼 숙명의 거대한 힘에 좌우되는 인간군상을 떠올리게 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도 성악가들의 존재감은 뛰어났다. 바리톤 이동환은 중후하고 풍성한 성량을 바탕으로 리골레토의 비극적 운명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이동환의 고급스러운 음색은 강한 자존심과 억눌린 현실에 대한 울분을 품은 천민 광대의 한계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냈다고 본다. 제11회 중국 음악 금종상에서 벨칸토 부문 금종상을 수상한 중국 소프라노 장원친은 티 없는 음색과 빼어난 기교로 아리아 '그리운 그 이름(Caro nome)'을 노래해 큰 갈채를 받았다. 이동환과 장원친은 복수의 이중창에서도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극적인 완성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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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오페라하우스가 선보인 오페라 '리골레토'의 한 장면. /대구오페라하우스
만토바 공작을 노래한 테너 유준호 또한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한 좋은 가창을 선보였고, 스파라푸칠레 역할의 베이스 류지상은 묵직하면서도 선명한 음색과 개성으로 우리 오페라에 또 한 명의 뛰어난 베이스가 있음을 알렸다. 이날 성악가들은 시각적 미학이 지배하는 무대에서 밀리지 않는 기량으로 오페라를 빛냈다.
디오오케스트라와 대구오페라콰이어 역시 디테일까지 잘 살린 연주로 작품의 한 축을 든든하게 담당했다. 다만 지휘를 맡은 김광현이 음악의 극적 효과에 치우쳐 감정적 조절이 부족했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김광현 지휘자가 무대 위 성악가와의 호흡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강약을 안배했더라면 더욱 완벽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1막 전주에서부터 높았던 지휘자의 감정의 파고는 성악의 영역까지 침범해 때때로 전체적인 균형을 흔들었다.
대형 LED 스크린을 활용해 미디어 아트의 몰입감이 높았던 것도 이날 오페라의 한 성공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연출자의 텍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본다. 고전과 첨단 기술이 창조적으로 융합해 새롭게 거듭났다. 작품과 치밀하게 조응하는 미디어 아트가 구현될 때, 오페라가 얼마나 풍성해지고 수준이 높아지는지 생생하게 체험한 프로덕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