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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인사이트] 비전은 문구가 아닌 행동으로 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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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4. 29. 18:05

황재원 한국교통대학교 교수
황재원 한국교통대학교 교수
짐 콜린스와 제리 포라스는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에서 100년 이상 존속하는 기업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비전(vision)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비전은 기업의 미래상, 사업영역에 대한 정의, 핵심 이념, 경영 철학 등으로 규정된다. 많은 기업들이 '미래를 그리다', '인류를 위한 진보', '모두의 더 나은 삶'과 같은 멋진 문구를 사용하여 그들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속하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왜 비전이 필요할까? 조안 마그레타는 '당신의 경쟁전략은 무엇인가?'에서 전략의 정수는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데에 있다고 설명한다. 전략을 수립한다는 것은 결국 선택과 집중을 한다는 의미인데, 이를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외하는 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때 해야 할 것과 포기할 것을 정하는 기준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비전이다.

BMW의 전통적인 정체성은 궁극의 드라이빙 머신, 실키 식스, 밸런스로 알려져 있다. BMW는 승용차와 스포츠카의 속성을 결합한 스포츠 세단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회사였으나, 부드러운 승차감을 선호하는 아시아 시장이 커지자 보다 마일드한 자동차를 만들게 되면서 '궁극의 드라이빙 머신'이 아닌 '순수한 운전의 즐거움'을 지향하였다. 또한 자연흡기 직렬 6기통 엔진은 강화된 유로 식스와 이산화탄소 규제로 인해 4기통 터보엔진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BMW에 남은 것은 전후 50:50의 무게 배분뿐이었으나 이마저도 포기해야 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2012년 미국 고속도로 안전보험협회가 차량 전면의 40% 부위를 충돌시키는 모더레이트 오버랩 테스트에서 25% 부위만 충돌시키는 스몰 오버랩 테스트로 바꿨을 때 벤츠, BMW, 아우디, 렉서스 등 대부분의 회사들은 불량 등급을 받았다. 다수의 업체들은 범퍼 안쪽에 보강재를 덧대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BMW로서는 보강재를 사용하면 차의 앞부분이 무거워지면서 밸런스가 무너지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결국 BMW는 보강재를 포기했고, 차기 모델에서 디플렉션 설계를 도입하여 무게를 늘리지 않으면서 충격을 튕기도록 하였다. BMW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존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던 일부를 포기했지만, 밸런스만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경영환경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적합한 논리일까? 정체성이 변화를 거부한다는 개념은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른 후 배를 타고 아테네로 귀환한다. 사람들은 그가 탔던 배를 보존하기 위해 썩은 판자를 떼어내고 새로운 판자로 갈아 끼웠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배의 모든 조각은 새것으로 바뀌게 된다. 모든 것은 달라졌지만 테세우스의 배가 가지는 정체성은 그대로였다.

포르쉐에서 1963년 처음 출시한 911은 엔진과 구동축이 모두 뒤에 있는 RR 방식이 적용되었다. RR 방식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이었지만, 엔진이 차체 중앙에 위치하는 MR 방식이 등장하면서 뒤가 무겁고, 대배기량 엔진을 탑재하지 못하는 취약성이 부각됐다. 포르쉐는 928, 968 등의 신모델을 시장에 출시하여 911을 대체하려고 하였으나, 시장은 여전히 911을 선호했고, 후속 모델의 잇단 실패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포르쉐는 판매량이 적은 스포츠카보다는 볼륨 모델을 만들기를 원했고, SUV인 카이엔을 개발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통 스포츠카를 만들던 회사가 눈앞의 이익 때문에 회사의 영혼을 팔았다고 비난했다. 반전은 신차 시승회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차를 타본 리뷰어들은 SUV의 탈을 쓴 911 같다는 찬사를 하였고, 여론은 뒤바뀌었다. 카이엔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출시한 4 도어 세단 파나메라 역시 세단의 외관을 한 911이라는 호평과 함께 연속적인 성공을 이어갔다. 결과적으로 포르쉐의 외양은 스포츠카에서 SUV로, 세단으로 바뀌었지만 911의 주행 감성을 제공한다는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페라리는 2015년 뉴욕증시에 상장한 후 주주들에게 지속적인 수익 성장을 증명해야 했고, 이로 인해 SUV는 만들지 않는다는 그간의 다짐을 깨고 2022년 푸로산게를 출시했다. 페라리는 푸로산게에 플래그십 모델인 812 슈퍼패스트와 동일하게 프런트 미드십 엔진 배치, 트랜스액슬 구조, 6.5L V12 자연흡기 엔진을 적용함으로써 푸로산게가 뜻하는 '순혈'이라는 의미 그대로 페라리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2024년 페라리는 28.3%라는 압도적인 영업이익률을 달성함으로써 시장으로부터 푸로산게가 페라리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았음을 인정받았다.

사람들은 비전을 확인하기 위해 회사 홈페이지에 적혀 있는 멋진 문구를 찾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전은 학교 교실에 걸려 있는 액자에 적힌 교훈과 비슷한 역할을 할 뿐이다. 진짜 비전은 말이나 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BMW의 비전은 '개인 모빌리티를 위한 가장 성공적이면서 지속 가능한 프리미엄 제조사'라고 적혀 있지만, 이들이 행동을 통해 증명한 것은 밸런스에 기반을 둔 '핸들링의 즐거움'이었다. 영속 기업의 조건은 비전을 문구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고집에 있다.

황재원 교수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에서 전략경영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숭의여자대학교 경영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교통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략경영, 전략분석, 글로벌 비즈니스, 스타트업 비즈니스 등의 교과목을 담당하며, 전략실행과 시너지의 이슈를 다루는 연구들을 주로 발표하고 있다. 한국외식경영학회 최우수심사자상, 한국산업경영학회 우수발표논문상, 한국기업경영학회 벽소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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