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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판은 모든 걸 받아들이는 판”...김명희의 ‘깊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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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26. 05. 07. 16:17

갤러리현대서 미니 회고전...40여점 통해 반세기 작업 조망
15. [갤러리현대] 김명희 《깊은 시간》 전시 전경 이미지, 갤러리현대, 서울, 2026_스케일 컷
김명희 개인전 '깊은 시간' 전경. /갤러리현대
"칠판은 공부도, 그림도, 제가 생각하는 모든 걸 그리고 또 지울 수 있는 굉장히 제너러스(generous·너그럽고 포용적인)한 판입니다."

화가 김명희는 7일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개인전 '깊은 시간'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대표 작업인 '칠판 회화'의 출발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2003년과 2012년에 이어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세 번째 개인전이다. 1970년대 초기 작업부터 뉴욕 시절 드로잉, 1990년대 이후의 칠판 회화와 영상 작업, 최근 자화상 신작까지 40여 점을 통해 작가의 반세기 작업 세계를 조망한다.

전시의 출발점은 1990년대 초 강원 춘천 내평리의 한 폐교였다. 소양강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에 남겨진 학교를 발견한 그는 "한국에도 폐교된 학교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찾아다녔다"며 "10년 동안 비어 있던 학교였는데, 그곳에서 작은 소녀를 그려보며 '아, 이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12. [갤러리현대] 김명희 《깊은 시간》 전시 전경 이미지, 갤러리현대, 서울, 2026_B1층
김명희 개인전 '깊은 시간' 전경. /갤러리현대
그는 뉴욕 소호의 오래된 공장과 내평리 폐교의 분위기가 맞닿아 있었다고 했다. "소호 역시 버려진 가내공장들에서 예술가들이 작업하면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며 "폐교의 칠판은 삶의 흔적과 시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김명희 작업의 핵심은 '칠판'이다. 검은 표면 위에 오일파스텔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빛과 시간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그는 "배경이 어두우니까 바로크 시대 작가들처럼 눈부신 빛을 표현할 수 있었다"며 "오일파스텔이 칠판 위에서 색이 굉장히 잘 살아난다"고 설명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차경, 봄·여름·가을·겨울' 연작은 내평리의 연못 풍경을 뉴욕 작업실에서 재구성한 작업이다. 실제 풍경의 재현이라기보다 기억 속 장소를 다시 호출하는 방식에 가깝다. 작가는 "춘하추동 작업은 미국에서 그렸지만 머릿속에는 늘 내평리 풍경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작업에는 이동과 디아스포라의 감각도 짙게 배어 있다. 스스로를 노마드보다 "앰뷸런트(ambulant), 즉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에 가깝다고 표현한 그는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형성된 경험을 회화 속에 축적해 왔다.

김명희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김명희 작가. /사진=전혜원 기자
1997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에서 만난 고려인들의 삶,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며 체감한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여성의 삶에 대한 관심 역시 주요 주제다. 다만 그는 "내 안목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며 "극단적인 여성주의와는 조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와 영상이 결합된 신작들도 눈길을 끈다. '김치 담그는 날 2025'는 자화상과 영상 설치가 결합된 작업이다. 비 오는 날 공항으로 향하는 차창 밖 풍경 영상과 김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중첩시키고, 조선 순조의 딸 복온공주가 쓴 오륜행실도 텍스트를 화면 위에 배치했다. 그는 "정지된 화면과 움직이는 화면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평생의 동반자였던 화가 고(故) 김차섭을 떠나보낸 이후 제작한 자화상 신작들도 처음 공개된다. 집안일을 하는 일상의 장면 속에 역사, 철학, 과학, 기억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구조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

1. [갤러리현대] 김명희, 김치 담그는 날 2025, 2025, 칠판에 오일 파스텔, LCD 모니터, 119 × 297.5 cm
김명희의 '김치 담그는 날 2025'. /갤러리현대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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