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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욕망 위를 날다…마이요가 뒤집은 ‘백조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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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26. 05. 17. 14:00

몬테카를로발레단 내한…악몽 같은 미장센과 안재용의 압도적 존재감
ⓒ Alice Blangero_DSC4624
몬테카를로발레단의 '백조의 호수(LAC)' 중 한 장면. ⓒ Alice Blangero /몬테카를로발레단
무대가 열리자 가장 먼저 관객을 사로잡은 것은 춤이 아니라 영상이었다. 흑백의 스크린 위로 펼쳐진 기괴하고 몽환적인 이미지들은 마치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불안하고 매혹적이었다. 설명보다는 암시로 움직이는 이 오프닝은 단번에 관객을 현실에서 떼어내며,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백조의 호수(LAC)'가 단순한 고전 발레의 재현이 아님을 선언한다. 익숙한 차이콥스키의 세계는 그렇게 처음부터 균열을 일으킨다.

1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만난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LAC)'는 고전의 서사를 해체하면서도 그 본질적 매혹은 더욱 선명하게 끌어올린 무대였다. 흔히 떠올리는 우아한 동화 대신, 이 작품은 인간 내면의 욕망과 공포, 선과 악의 경계를 파고드는 표현주의적 심리극에 가까웠다. 밤의 여왕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무대는 음산한 에너지로 뒤덮였고, 무용수들의 몸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 어딘가를 떠다니는 존재처럼 보였다.

ⓒ Alice Blangero_DSC2012
몬테카를로발레단의 '백조의 호수(LAC)' 중 한 장면. ⓒ Alice Blangero /몬테카를로발레단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각적 완성도다. 필립 기요텔의 의상은 이번 공연의 미학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였다. 백조들의 손끝에 달린 깃털 장식은 단순한 소품을 넘어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흐리는 장치처럼 기능했다. 무용수들이 팔을 뻗고 몸을 뒤틀 때마다 그 깃털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흔들렸고, 군무는 기존 클래식 발레의 정교한 대형미보다 훨씬 야생적이고 원초적인 에너지를 뿜어냈다.

흑조와 백조 역시 전형적 대비를 넘어선다. 둘은 선과 악으로 단순히 나뉘지 않는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고, 한 인간 안의 양가적 욕망처럼 보인다. 마이요는 누구나 알고 있는 '백조의 호수'를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재구성하면서도 원작의 정서적 울림은 잃지 않는다. 바로 그 균형감각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든다. 고전을 파괴하기 위해 현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 안에 잠들어 있던 어둠과 욕망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끌어올린다.

차이콥스키의 음악 역시 흥미롭게 변주된다. 익숙한 선율은 때로 날카롭게 비틀리고, 때로는 숨을 죽인 채 흐르며 무대 위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따라간다. 여기에 무용수들의 탄탄하게 단련된 신체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순간순간 인형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맹수처럼 날렵한 몸의 각도와 긴장감은 이 작품의 초현실적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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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카를로발레단의 '백조의 호수(LAC)' 중 한 장면. ⓒ Alice Blangero /몬테카를로발레단
왕자 역의 안재용은 단연 눈에 띄었다. 그는 단순히 테크닉이 뛰어난 무용수를 넘어, 마이요의 세계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구현하는 존재처럼 보였다. 불안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왕자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했고, 강렬한 존재감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한국 무용수가 세계 정상급 발레단에서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집중력 역시 인상적이었다. 난해할 수도 있는 표현주의적 장면들 속에서도 객석은 끝까지 무대의 호흡을 따라갔다. 익숙한 클래식 레퍼토리를 넘어서는 현대적 재해석에 이처럼 뜨겁게 반응하는 풍경은 한국 공연 관객층의 높은 감각을 새삼 실감하게 했다.

마이요의 '백조의 호수(LAC)'는 아름다운 동시에 불온하다. 우아하면서도 섬뜩하고, 차갑지만 강렬하다. 그리고 그 모순된 감각들이 충돌하는 순간, 이 공연은 단순한 발레를 넘어 강렬한 현대 예술로 완성된다. 적어도 올해 상반기에 만난 공연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 매혹적인 무대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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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카를로발레단의 '백조의 호수(LAC)' 중 한 장면. ⓒ Alice Blangero /몬테카를로발레단④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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