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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文香世談] 곁에 남는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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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5. 17. 17:45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오월의 초록 숲은 신(神)이 오랫동안 아껴둔 마지막 붓질을 막 끝낸 듯한 풍경이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계절을 '가정의 달'이라 부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이어지며 감사의 말이 오가고, 꽃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 환한 풍경은 되묻는다. 우리는 이 충만함 속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

로맹 가리(필명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정면으로 이 질문을 제기한다. 파리의 가난한 이민자 거리에서 살아가는 소년 모모는 나이도, 출생도 분명하지 않다. 그의 어머니는 행방을 알 수 없고, 그는 아우슈비츠를 겪은 유대인 생존자 로자 아주머니와 함께 산다. 한때 매춘부였던 로자는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며 생을 버틴다. 두 사람은 혈연이 아니지만,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가족이 된다. 그들의 삶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가난과 불안이 일상이다. 그러나 그 고단한 시간 속에서 서로의 외로움을 견디며 끝까지 곁을 지키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모모는 늙어가는 로자를 돌보고, 로자는 어린 모모를 지킨다. 그것은 제도나 계약이 아니라 함께 견뎌낸 시간과 책임이 만든 결속이다. 우리가 떠올리는 '가정'은 흔히 혈연과 형식으로 정의되지만, 이 소설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살아가는 고통을 함께 나누는 시간과 서로에 대한 책임이 없다면 그 이름은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시간이 흐르며 로자는 늙고 병든다. 수용소의 기억이 투영된 병원에 대한 공포가 그녀를 짓누를 때, 모모는 어른들이 회피하는 선택을 대신 감당한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하밀 씨의 말처럼, 그는 로자를 병원에 보내는 대신 집 안의 가장 어두운 곳, 그 좁고 고립된 '유대인 동굴'이라 불리는 지하실 방으로 그녀를 데려가 마지막을 함께한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태도다. 모모는 옳은 답을 아는 아이가 아니다. 서툴고 위태로우며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로자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인간은 완벽한 정답을 내놓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기준을 제시한다.

이 기준 앞에서 오늘의 사회를 바라본다. 우리는 점점 타인의 삶 앞에 서기보다 그것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위치로 물러난다. 돌봄은 서비스가 되고, 고통은 관리의 대상이 되며, 관계는 언제든 해지할 수 있는 선택이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정은 정서적 공간이기보다 기능적 단위로 변해간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시스템과 복지는 필수적이다. 개인이 모든 돌봄의 무게를 혼자 감당할 수 없기에 제도는 든든한 안전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돌봄이 위탁되는 순간, 관계의 체온은 식고 마음의 거리는 벌어진다. 효율과 편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고통을 견디는 일을 오직 제도와 자본에만 위임할 때, 그 틈새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얼굴은 사라지고 만다. 5월에 기념일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실제의 체온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공허한 형식에 머문다.

약한 존재를 대하는 방식은 그 사회의 품격을 말해준다. 로자와 모모는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비생산적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가장 약한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곧 인간성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기준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돌봄은 책임이 아니라 비용으로 계산되고, '가정의 달'이란 화려한 수사 아래서도 우리는 관계를 확인하기보다 소비한다. 비싼 선물은 남지만, 서로의 눈을 맞추며 삶의 무게를 함께 견디는 시간은 남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다. 우리는 죽음을 늦추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격리한다. 병원은 생명을 연장하는 곳이지만, 때로 존엄 없는 소멸을 강요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로자가 병원을 두려워한 이유는 기계에 둘러싸인 고립이었다. 모모는 그 공포를 이해했고, 제도의 안전보다 마지막 순간 곁에 있겠다는 불완전한 온기를 선택했다.

그 어두운 방은 비효율적이고 비위생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 인간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보는 책임은 우리가 외면해 온 인간의 본질을 드러낸다. 나는 누군가의 짐을 기꺼이 나누어 짊어지는 '모모'였던 적이 있는가. 타인의 고통을 효율의 이름으로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인간은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 앞에 온전히 서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이 오래된 진실은 오늘날 낯설고 불편한 풍경이 됐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정보로 더 빠르게 판단하지만, 정작 누군가의 고통 곁에 오래 머무르는 법은 잊어가고 있다. 타인의 삶 앞에 서는 일은 이제 드물고 귀한 용기가 되었다. 오월의 햇살은 여전히 눈부시고 만물은 생명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환한 빛에 취해 관계의 무게를 뒤로 미룬다. 서로를 보살피는 일의 고단함 속에 인간의 마지막 위엄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인간의 삶은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묵묵한 머무름 속에서 비로소 여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유대이며, 더 빠른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오래 곁을 지키는 태도다. 타인의 삶을 해석하는 영민함이 아니라, 그 아픔 앞에 기꺼이 서는 용기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누군가의 고독한 삶 끝에 자신의 이름을 조용히 함께 적어주는 일,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오래 머무르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에게 건넬 수 있는 마지막 존엄이다.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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