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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OECD가 직전인 2021년 발표한 'PISA 21세기 독자' 보고서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었다. 정보의 신뢰성을 식별하는'디지털 문해력'조사에서 한국 청소년은 최하위권으로 분류됐다. 문장에서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능력의 식별률은 25.6%로 OECD 국가 평균 47%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이 조사는 당시까지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디지털 문해력 부문에만 초점을 맞춰 조사한 것이다. 스팸메일이나 피싱성 정보에 노출됐을 때 반응하는 태도를 평가하는 형태로 이뤄졌다고 한다.
결국 글을 읽어내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그 정보가 사실인지 의견인지, 믿을 만한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능력은 그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읽기 능력과 판별 능력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여러 국내 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 간극은 AI 시대에 접어들며 더 위험한 문제로 번질 수 있다. 문해력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기술이 아니라, 정보의 맥락을 파악하고 근거를 따져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취약하면 AI가 생성한 답변을 검증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생성형 AI는 그럴듯한 문장으로 사실과 다른 정보를 제시하기도 하고, 근거나 맥락을 생략한 채 결론만 요약해 전달하기도 한다. 이때 원문을 읽어내고 앞뒤 맥락을 재구성할 문해력이 없다면, 사용자는 AI가 내놓은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판단과 검증의 주체가 인간에서 기계로 옮겨가는 셈이다. 마치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몸에 해로운 요소가 있을 수도 있는 달달한 당의정을 주는 대로 먹는 것과 같다.
이런 흐름이 방치되면 악순환에 걸려 들게 된다. 문해력이 낮은 사용자일수록 AI를 검증 없이 활용하게 되고, 검증 없는 활용이 누적될수록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훈련 기회는 줄어든다. 훈련 기회가 줄면 문해력은 더 떨어지고, 떨어진 문해력은 다시 AI에 대한 의존도를 높인다. 결국 문해력 격차가 AI 활용 수준의 격차로, 그 격차가 다시 문해력 격차로 이어지는 악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AI가 광범위하게 활용될수록 최종 판단에 인간이 개입하는'휴먼 인 더 루프(Human In The Loop, HITL)'의 중요성이 오히려 커진다. AI가 데이터를 학습하고 결정을 내리는 전 과정에서 사람이 직접 개입해 검증, 감독, 조정 등으로 AI 정확성을 높이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말한다.
말하자면 결정적 고비마다 사람이 의사결정을 한다는 얘기다. 그 전제 조건이 바로 문해력이다. AI가 판단을 대신해 주는 만큼, 그 판단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인간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 역량이 저절로 갖춰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읽지 않으면 생각하거나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게 된다. 휴대폰만 열면 짧고 자극적인 영상(숏폼)이 넘쳐난다. 이에 길들여지면 긴 글의 맥락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생각과 사고의 근육이 퇴화한다. 악순환의 고리에 걸려들면서 가짜뉴스가 창궐하는 최적의 환경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확증 편향도 더 심해진다. 문해력이 낮을수록 정보의 교차 검증(생각)을 귀찮아하게 되며,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달달한 정보나 믿고 싶은 가짜뉴스만 수용하게 된다. 이미 이런 형태의 선전 선동술은 정치나 사회 일반에서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자기의 관점과 의도를 슬쩍 섞어 타깃층의 입맛에 딱맞는 뉴스(정확히는 허위정보)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미 게이트키핑(검증 과정)을 거친 정보와 유튜브 등 SNS에서 무분별하게 생산되는 정보가 거의 구분될 수 없는 정도로까지 소비되고 있다. 앞으로는 AI가 생산해 내거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AI를 통해 생산해 내는 허위조작정보가 더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 AI시대 문해력은 단순한 독해력이 아니다. 정보의 참과 거짓을 판별하고, 옳지 않은 의도를 의심할 줄 아는'디지털 방어력'이다. 디지털 방어력은 자기와 가족의 보호, 자기의 정당한 이익을 침해받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다.
디지털 방어력은 AI로 얼마나 빨리 결과물을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AI가 내놓은 결과를 얼마나 정확히 읽어내고 검증하느냐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 디지털 방어력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문해력은 더 이상 국어 과목의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긴요한 판단력의 기초 체력이라 할 수 있다. AI를 똑똑하고 유용한 비서로 쓸 건가, AI의 판단과 결정에 끌려다닐 건가.
김명호 (객원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