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과 점심을 먹고, 재래시장을 일부러 지납니다. 뭐가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요. 역시 풍요의 계절 가을입니다. 각종 과일과 곡식들이 그득합니다. 생선들도 넘쳐나고요. 한켠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습니다.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갓 캐어낸 토란입니다. 아, 얼마만에 보는 것인지요. 잠시서서 옛 생각에 잠깁니다. 오래전 전남 나주에서 ‘주몽’을 촬영할 때로 기억합니다만, 촬영 때문에 정신없다가 마을 유지분에게 식사초대를 받았습니다. 시골이라 찬이 없다고 쑥스러워하시며, 집밥 먹어보라며 정성스레 끓여주시던 토란탕. 어린 시절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추석 언저리 한달 정도에만 먹을 수 있는, 식당에서 돈 주고는 잘 먹을 수 없는 고향의 음식이지요.
뽀오얀 장국입니다. 국물부터 떠먹습니다, 뜨겁게 목구멍을 넘는 국물은 담백하고 시원합니다. 통상 들깨가루를 넣기 때문에, 약간 푹신한 스프 같은 느낌과 깊고 구수한 맛이 배어 있습니다. 햇감자보다 더 팍신팍신한 토란의 씹는 맛은 참 재미있습니다. 사각사각 씹히는 맛이 일품인 토란은 다른 덩이뿌리보다 향미가 훨씬 강하고, 질감은 하얀 감자와 비슷하지만 견과와 흙맛이 좀더 강합니다. 식으면 매우 끈적끈적해지기 때문에 뜨거울 때 먹어야 합니다. 후루룩 국물을 마십니다. 묵직하고 구수하고 담백합니다. 계절이 무르익는 동안 땅의 기운을 품고 함께 알차진 가을 토란은 이름 그대로 ‘땅의 알(土卵)’, 영양이 최고에 달하여 한마디로 ‘알토란 같은 땅의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가을의 맛입니다.
저희집은 제사때 토란탕을 올리지 않고 소고기무우국을 합니다만, 여러 지방에서 제사상에 올릴 정도로 역사가 아주 깊은 토란탕입니다. 고려시대 ‘향약구급방’에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미뤄 고려시대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토란탕을 즐겨 먹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의 궁중음식이기도 하구요. 지금도 하와이를 비롯한 열대 아시아지역의 주식인 타로(Taro)도 토란의 일종으로 보면 됩니다. 아마 고려시대 이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널리 즐기던 음식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나라 헌종 원화 10년(815), 17세의 시인 장의조는 ‘무명가(無名歌)’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중략) 무녀(舞女)는 뜰 앞에서 고기와 술에 질렸건만, 백성의 배고픔을 모르네/임금은 성 밖의 빈 곳간을 못보고, 장군은 오로지 화초만 가꾸네/임금은 성밖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도, 토란꽃을 버들 솜처럼 여기네. 토란이 당나라때, 백성들의 주식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는 시입니다.
토란은 먹기 직전에 조리해야 합니다. 토란을 맨손으로 손질하면 옻나무를 만졌을 때처럼 몸이 가려울 수 있으니 반드시 고무장갑을 끼고 손질해야 합니다. 먼저 깨끗하게 손질한 토란을 쌀뜨물에다 하룻밤 정도 담가 울궈 놓습니다. 아린 맛을 제거하기 위해서지요. 그런 다음 쇠고기를 채썰어 맑은 장국을 끓이다가 다시마를 넣어 끓이고, 토란을 넣어 익힙니다. 다 익었으면 쌀가루 조금과 들깨가루를 넣고 5분정도 더 끓여주고, 다진 마늘과 대파로 마무리합니다. 지방에 따라 닭을 넣어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토란은 삶아먹지 쪄 먹지는 않습니다. 아린 맛이 있어서입니다. 토란에는 소화를 돕고 변비를 예방하고 지방을 분해하는 효소가 있고, 알칼리 음식인 토란은 몸에 이롭고 조화로운 음식을 섭취하는 뜻이 있다합니다. 특유의 미끈거리는 성분은 무틴으로 이것이 체내에서 글루크론산을 만들어 간장이나 신장을 튼튼히 해주고 노화방지에도 좋답니다.
사무실에서 보는 가을 하늘은 푸르고 높습니다. 이제 가을이 깊어가고, 곧 스산한 바람이 불겠지요. 이 계절이 되면 왠지 조금은 외로워집니다. 이런 증상을 가을 탄다고 하지요. 가끔 하는 생각입니다만, 배고픔과 외로움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배고픈 건 음식을 먹으면 해결이 되지만, 외로운 건 어머니의 음식이나 고향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한해 동안 땅의 정기를 머금고 자란 토란, 한해 중 단풍이 아름다운 요즈음에만 먹을 수 있는 토란입니다. 아쉽게도 음식점에서는 잘 팔지 않으니, 시장에서 토란을 사서 집에서 직접 해 먹어야지요. 혹여 껍질 벗긴 수입산을 사시지 말고, 껍질채 있는 국산을 사 가세요. 맛이 아예 비교가 안 됩니다.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시린 이 가을에, 따뜻한 마음으로 요리해서 나눠 먹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알토란 같은’ 식구들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