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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청와대 기습 사건, 지금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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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 기자

승인 : 2015. 01. 21. 07:21

당시 박정희 대통령 딸인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있어…김일성 주석 손자인 김정은 북한 지배…천안함·연평도 '1·21사태 복사파'…김신조 "우씨 형제 안 만났더라면 세상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몰라"
'66주년 경찰의 날' 맞아 참배하는 이성규 서울경찰청장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기습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남파됐던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교전하다가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 순직비 앞에서는 해마다 1·21사태 추모대회와 함께 경찰의 날 참배 행사가 열린다. / 사진=서울지방경찰청 제공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이 특수게릴라전 특공대원들을 내려 보냈던 1968년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이 일어난 지 꼭 47년이 됐다.

그 당시 16살이었던 박 대통령의 딸은 지금 박근혜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있다. 1·21사태를 일으킨 김일성 북한 주석의 손자인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현재 북한 3대 족벌체제를 이어 받고 있다.

1·21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31명의 무장공비를 남파한 사건이다. 청와대를 습격하기 전 주민들의 신고로 28명은 사살되고 1명은 생포됐다. 2명은 다시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무장공비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으로도 불린다.

당시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습격 지령을 받고 1월 16일 황해도 연산을 출발했다. 이들은 1월 17일 밤 11시쯤 한국군 군복을 입고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의 남방한계선을 은밀하게 통과했다.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 서울을 향해 남하하던 무장공비들은 1월 19일 오후 2시쯤 파주 법원리 삼봉산에서 나무를 하던 민간인 4형제와 만나게 되면서 정체가 발각됐다.

이들 형제가 파주경찰서에 신고하면서 무장공비 침투 사실이 알려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무장공비들의 최종 목표가 청와대 습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후 군·경의 검문 활동이 강화됐지만 무장공비들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 1월 21일 밤 10시쯤 서울 심장부까지 뚫고 들어온 무장 공비들을 자하문 고개에서 검문 중이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공비들 간에 첫 교전이 이뤄지면서 본격적인 대간첩작전이 전개됐다. 2월 3일까지 15일 간 지속된 이 작전에는 16개 부대 1만9186명이 참가했고 이 과정에서 31명이 전사하고 51명이 부상했다.

유일하게 생포됐다 사상 전향을 한 김신조 목사는 “파주시 법원리 형제봉에서 남한말을 쓰고 남한 군복을 입고 1시간에 12㎞씩 이동했는데 워낙 빠르게 이동하느라 신발이 다 젖어 발이 얼면 안 되니까 일본제 농구화로 갈아 신고 산기슭에서 쉬고 있을 때 나무하러 온 우씨 4형제를 만났다”면서 “일본제 농구화를 수상하게 여긴 우씨 형제들이 바로 신고를 했다. 당시 교본대로 그들을 죽였어야 했는데 꽁꽁 언 땅을 파고 묻을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다. 그때 우씨 형제를 안 만났더라면 지금 세상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 군인들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최전방에서 완전하게 차단해야 된다”고 말한다.

당시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124군부대 소속이었다. 이 부대는 북한군 민족보위성(현재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의 특수부대였다. 124군부대의 목표는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였다. 무장공비들은 1월 21일 오후 8시를 청와대 습격 시간으로 정했다. 일요일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무장공비들은 3∼4분 만에 습격을 끝내고 청와대 차량을 탈취해 습격 당일 북한으로 돌아가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김신조 침투로 정비
경기도 연천군은 1968년 1월 발생한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의 무장공비 침투로를 1998년 장남면 반정리 694번지에 생생하게 재현해 설치했다. 안보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사진=연천군청 제공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북한학 박사)는 21일 “1968년 124군부대의 남파는 북한 내부 권력투쟁과 충성경쟁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일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베트남전쟁과 관계가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북한이 1·21사태를 일으키고 그 이틀 뒤에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것은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막고 미군의 관심을 분산시켜 결과적으로 호찌민을 지원하려 했다는 것”이라면서 “특히 이들 사건이 1월 30일 베트콩이 사이공에서 벌이는 구정공세(Tet Offensive)와 시기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원은 “1·21사태를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을지훈련이 생겼으며 주민등록증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한국 사회의 전체 변화를 초래한 중대한 사건이었다”면서 “한국 사회는 그 당시에 대통령의 딸이 지금 대통령이 됐으며, 북한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까지 3대에 걸쳐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1·21사태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건으로 천안함·연평도 포격 도발도 ‘제2의 1·21사태의 복사판’이라는 분석이다. 북한의 도발 행태는 달라졌어도 대남 적화 통일과 공산화에 대한 근본 속성은 아직도 변한 것이 없다는 평가다.

1997년 1월 목사 안수를 받은 김신조 목사는 47년 전이나 지금이나 북한의 근본 속성은 변하지 않았으며 북한 정권은 무너질 때까지 대남 적화 공산화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각심을 주문했다.

김 목사는 1942년 6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났다. 남파 공작원 출신의 사상 전향자이며 대한민국의 개신교 목사다. 1961년 3월 북한 민경정찰중대에 입대해 124군 특수부대 근무 중 남파됐다. 무장 게릴라 31명 중 유일하게 생포된 이후 서울침례회신학교에서 침례교 신학을 전공했다. 서울성락교회 목사로 목회 활동을 했다.

현재 국가 안보단체 사회활동으로 일선 군 부대와 국민들을 대상으로 대북 안보강연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1994) 저서가 있으며 1남1녀를 두고 있다.

김 목사는 20일 아시아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속성은 47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북한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남한에 대한 공산화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지금 남한을 공갈 협박하도록 만든 우리 내부 스스로를 깊이 자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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