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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3주년 기념 특집연재] ‘외숙모’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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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기자

승인 : 2023. 06. 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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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화 단편소설
사본 -외숙모3
삽화=장봉군 화백
한국전쟁 73주년을 앞두고 홍상화 작가의 단편소설 '외숙모' 전문을 3회(上 12일자·中 14일자)에 걸쳐 게재합니다. 분단의 질곡이 지속하는 상황에서 문학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자는 취지입니다. '외숙모'는 젊은 나이에 결혼해 부부의 정을 느끼기도 전에 남북으로 헤어져 소식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이산부부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전쟁의 이면을 다층적으로 되돌아보고 분단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는, 희망을 느끼게 하는 귀한 분단문학 작품입니다. <편집자 주>
외숙모 下

5

나는 승객이 나오는 출구로 발길을 옮겼다. 무리를 지어 모습을 드러내는 승객들 중 조금 전 머릿속에서 그려본, 삶에 찌든 환갑 정도 되는 노인의 모습을 찾았다. 먼저 젊은이들이 나온 다음 띄엄띄엄 나이 든 승객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바짝 긴장했다. 젊은이들 못지않게 떠들썩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중년을 넘긴 여인네들이 나타났다. 힘겨운 40여 년의 세월을 보낸 외숙모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런 모습의 노인은 아직 눈에 띄지 않았다.
출구 쪽에 바짝 다가서며 앞만 응시하고 있는 나를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았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기껏해야 50대 중반을 넘지 않았을 것 같은 어떤 중년 부인이 내 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내 앞으로 그 부인이 몇 발자국 다가섰다. 그리고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서야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소설가 현 선상님? 맞지예?"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외숙모님이세요?"
"맞십니더."
그제서야 나는 정신이 들어 내 손을 잡은 외숙모의 손을 포개어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외숙모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어떻게 모습이 그대로세요?"
"무신 말씀을…… 이제 환갑내기 할매가 안 됐십니껴?"
"아니에요. 그렇게 안 보이세요."
나는 외숙모의 두 손을 이끌고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어 외숙모의 옆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엷게 화장을 했으나 내가 연애 상대자로서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외숙모는 여전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어떤 험한 세파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처럼 순진함이 얼굴 전체에 묻어 있었다. 외숙모는 나의 놀라움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우짜노. 우짜다가 이래 됐십니껴? 그렇고롬 예쁘장한 얼굴이 우째 이리 됐십니껴?"
외숙모는 그렇게 말하면서 반백이 된 내 머리에 눈길을 보냈다.
"우짤꼬. 소설 쓰는 게 그레 힘듭니껴? 머리도 다 세었네예."
"머리가 셀 나이가 되었지요."
"쉰 살 아입니껴? 나하고 열 살 차이니께."
"그래요. ……근데 외숙모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야기가 좀 깁니더."
외숙모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장난스러운 옛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웃음을 쏟으며 지난 일들을 들려주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내가 능바우를 떠나고 1년 후 외숙모는 시가에서 나와 친정으로 가서 1년쯤 지내다가 읍에서 포목장사를 하는 10년 연상의 남자와 재혼했다는 것이다. 그 남편도 몇 년 후 세상을 뜨고, 외숙모 혼자 대구에서 이런저런 장사를 하다가 지금은 역전 근처의 옛날 공회당 옆에서 따로국밥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위치와 식당 이름을 자세히 알려주며 나에게 대구에 올 일이 있으면 꼭 들르라고 신신당부했다. 세상 어느 누구의 눈에도 외숙모는 행복한 여자로 비쳐질 만큼 조금도 세파에 시달린 흔적이 없었다. 외숙모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 묻고 싶은 질문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외숙모님, 능바우 떠나실 때……."
내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질질 끌자, 외숙모는 무엇이 우스운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다른 한 손으로 나의 팔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때 말이지예, 친정아부지가 능바우에서 나오라 캐서예. 외조모님한테 말씀드릴라 캤는데 염치가 없어 말 못하겠데예. 그래 짐 싸가지고 달밤에 살그머니 나왔지예……. 무슨 유행가 가사 같지예?"
외숙모가 그렇게 말하면서 겸연쩍은 듯이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어젖혔다.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았던 40여 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는 등잔불 밑에서 유행가를 같이 불렀던 40여 년 전의 순진했던 스무 살 새색시와 열 살 소년으로 되돌아갔다.
"외숙모님, 좀 일찍 연락을 주지 그러셨어요?"
나는 이렇게 쾌활한 외숙모를 일찍 못 만난 게 아쉬워서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능교? 서방 소식도 기다리지 않고 달밤에 도망간 년이 뭐이 잘났다고 선뜻 연락할 끼고. 환갑 노인이 되니까 좀 용기가 생기데예. 이번엔 큰맘 묵고 연락했지예."
외숙모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나는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소년 시절로 돌아간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순간 남·북 적십자사 간에 몇 달 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했다는 며칠 전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외숙모님, 통일원에서 이산가족 방문 신청을 받는다는데 한번 신청해보시지요."
"필요 없심더. 살아 있다 카믄 아들딸 놓고 잘살 끼고, 죽었다 카믄 할 수 없는 기고……."
"생존해 계시다면 만나보셔야지요."
"만나면 뭐할 끼요!"
"그래도……."
"나를 노인 동무라고 부르면 우짤 끼요, 안 만나는 게 낫지……."
외숙모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은은한 미소 속에 자신의 젊음을 삼켜버린 세월의 흐름을 야속해하는 여인의 마음이 묻어 있었다. 아직도 외숙모의 기억 속에는 젊은 외삼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노인 동무라고 부르시지 않을 거예요."
"현 선상님이 우째 아능교?"
"외숙모님이 너무 젊게 보이세요."
그렇게 외숙모에게 말한 후 곧 덧붙였다.
"외삼촌이 외숙모님을 여성 동무라고 부르실진 모르지요."
외숙모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라믄 지는 우째 불러야 합니껴?"
"노인 동무라고 부르세요."
"와요?"
"지금쯤 폭삭 늙으셨을 거예요."
"그걸 우째 아능교?"
"그 동네 살면 그렇게 늙게 되어 있어요."
나는 미소 속에 외숙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외숙모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렸다.
"그리고 외숙모님을 항상 그리워하고 계실 거예요. 만족시키지 못하는 그리움은 사람을 늙게 하지요."
내가 마치 외삼촌을 근래에 뵙기라도 했듯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라믄 한번 신청해보믄……."
외숙모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가 얼버무렸다.
그 순간 외숙모가 사랑을 하는 여자의 마음을, 스무 살 때의 마음 그대로 한 점의 변화도 없이 40여 년 동안 간직해왔음을 나는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기대보단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내가 외숙모에게 불어넣어준 자신감이 원래 만나지 않겠다던 그녀의 마음을 바꿔놓았으리라……. 나는 맞잡은 외숙모의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 신청기간이 한 달이나 남았어요. 신청해도 꼭 된다는 법도 없고요."
내가 외숙모의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실제 확률이 10퍼센트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살아 있는지도 모르잖십니껴?"
"그것도 그래요."
"마 그라믄 한번 신청해보믄 어떻겠십니껴?"
외숙모가 이제는 나의 동의만 필요하다는 듯이 자신 있게 물어왔다.
"생각해보고 알려주세요. 제가 외숙모님 대신에 신청할 수 있어요."
외숙모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재혼은 했었어도 아이는 놓은 적이 없심더. 그냥 우얀지 낳기가 싫어서예……."
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다급한 생각에 상체를 숙여 외숙모를 살며시 껴안았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해야 할 것 같아 외숙모의 귀에 대고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아이를 가졌더라도 외삼촌이 뭐라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후 외숙모의 자그마한 등을 두어 번 두드린 후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외숙모님, 점심 하셔야지요. 제가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것 대접할게요."
"근데 우얄꼬. 동행이 있어서……. 요 다음 서울 올 때 같이하면 안 되겠십니껴?"
"그럼, 그렇게 하지요."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차장에 서 있는 관광버스 창으로 외숙모의 일행인 듯한 여인네들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외숙모가 못내 아쉬워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외숙모가 버스에 오르자, 순간 숨막히는 아쉬움이 나를 휩쌌다. 전쟁 때 외숙모가 등잔불 밑에서 나에게 가르쳐준 노래가 무슨 노래였는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소설에 쓰려고 했으나 노래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 노래는 외숙모가 신방으로 차린 골방에서 나에게 가르쳐준 유행가이자 밤에는 옆방에 있는 시어머니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소리 죽여 같이 부르곤 했던 유행가였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낮에 들판에서 밭일을 하는 외숙모에게 군가를 가르쳐준 나의 노력에 대한, 외숙모로서 할 수 있는 당연한 보답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는 노래였다.
나는 막 떠나기 시작하는 버스로 달려갔다. 외숙모가 앉아 있는 창가로 가 차창을 열라고 손짓을 했다. 차창이 열리고 외숙모가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외숙모님, 우리가 골방에서 불렀던 유행가 제목이 뭐지요?"
외숙모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타향살이>* 입니더."
그때 마침 버스가 주차장에서 큰길로 빠져나가기 위해 잠시 정차했다.
"<타향살이>? ……맞아요……. <타향살이>예요."
내가 그 자리에 선 채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어떻게 시작하지요?"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외숙모가 손놀림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타향살이> 첫 소절을 나지막이 불렀다. 전쟁 중 골방에서 나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줄 때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외숙모가 그때보다 더 자유스러워 보이고, 더 밝아 보이고, 더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더니 주차장에서 빠져나갔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나에게 외숙모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들어주었다. 그러면서도 버스 안에서는 <타향살이> 노래가 계속되는 듯했고, 그 노래가 내 귀에 뚜렷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서 외숙모가 탄 버스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며 나는 입속으로 그 노래를 계속해서 불렀다. 마치 외숙모가 저었던 손놀림에 맞추어 노래하듯이, 박자가 틀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타향살이 몇 해던가 /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 청춘만 늙-고

일절의 노래가 끝났다. 그리고 곧 이절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내 뇌리, 아니 가슴속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막 터져 나오듯이 흘러나왔다.

부평 같은 내 신-세가 /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 하늘은 저-쪽

그런 다음 놀랍게도 삼절도 거침없이 이어졌다.

고향 앞에 버드나무 / 올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 그때는 옛-날

외숙모가 탄 버스가 자취를 감출 때까지 나는 그렇게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노래가 끝났을 때, 40여 년 동안 사라졌던 그 무엇이, 아마도 세상살이에 꼭 필요했던 그 무엇이 노래가 시작되면서 찾아졌다가 방금 노래가 끝나면서 사라져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부평 같은 내 신세가/혼자도 기막혀서'라고 가사의 일부분을 입속에서 중얼거리며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순간 그 구절이 가슴에 확 와 닿았다. '혼자도 기막혀서…….' 여기에는 세계 어느 불멸의 시 구절에 못지않은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듯했다. 무언가 잡힐 듯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는, 아마도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듯했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외숙모는 그때 <타향살이>처럼 오래되고 남성적인 노래를 좋아했을까? 다음번 만나면 외숙모에게 꼭 물어보기로 작정했다.
나는 길게 늘어선 한강 둔치를 걸어가다 한강을 마주 보며 섰다. 어느새 강물은 잔잔해졌고, 그 위로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둔치를 따라 다시 발길을 옮겨놓다가, 강물에 비친 나의 옆모습을 슬쩍 보았다.
그 모습엔 40여 년 전 내가 고아가 된 줄 알았을 때의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 겹쳐 있었다. 동네 앞 시내가 처량하게 보이고, 둥근 달이 슬픈 빛을 띠기 시작하고, 한겨울이 매서운 들바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때였다.
그 순간, 외숙모가 나에게 <타향살이> 노래를 가르쳐주고 같이 불렀던 이유를 깨달았다. 고아가 된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한 여인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는 데 내겐 40여 년의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었으니.
그런 내가 어찌 외숙모의 삶을 짧은 시간에 소설화할 수 있겠는가? 나에겐 그럴 만한 자격도 없고 가능한 일도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니, 혼자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힐 일이었다.

*<타향살이> : 1934년 고복수가 발표한 대중가요로 당시 해외 동포들에게 고향을 그리는 마음의 노래, 즉 망향가처럼 불렸다.

사본 -홍상화 작가 사진1
홍상화 작가/ 한국문학사 제공
▶ 홍상화 작가는 1940년 대구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거쳐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예지 '한국문학' 주간과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장편소설 '피와 불'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작품을 영화로 각색해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 2005년 소설 '동백꽃'으로 제12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소설 '정보원' '거품시대'(전 5권) '사람의 멍에' '범섬 앞바다' '디스토피아' '30-50 클럽', 소설집 '내 우울한 젊음의 기억' 등이 있다. '거품시대'는 조선일보에, '불감시대'는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됐다.
김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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