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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로 빚어낸 낯섦과 친밀함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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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4. 29. 13:48

연극 '제나 잘콴다리여' 리뷰
낯선 언어 속에서 웃고, 당황하고, 결국은 이해하게 되는 시간
사투리 너머의 세계, 관계의 온도를 빚어낸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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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의 어감과 리듬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연극 '제나 잘콴다리여'/ 무죽페스티벌 제공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연극 '제나 잘콴다리여'는 제주라는 땅의 언어를 통해, 언어가 품은 세계와 관계의 의미를 섬세하게 풀어내는 작품이다. 한 사람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한 무리는 언어를 멈추지 않는다. 이 불균형 속에서 생기는 어색함과 두려움, 그리고 어느 순간 찾아오는 다정함이 이 연극의 중심을 이룬다.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관계 맺기의 감각적 통로임을 '제나 잘콴다리여'는 천천히, 그러나 뚜렷하게 증명해 나간다.

극은 서울이라는 중심 언어권에 속한 인물 '우진'이 제주라는 낯선 언어권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된다. 무대 위 할망(할머니), 하르방(할아버지), 족은할망(작은할머니)은 거침없이 제주어를 구사하고, 우진은 이를 어눌하게 흉내 내며 당황하고 절망한다. 제주어는 단순한 사투리가 아니다. 대본 곳곳에 살아 숨 쉬는 제주 방언이 등장하며, 언어가 단순한 소통의 수단을 넘어 지역의 문화와 기억을 지탱하는 층위임을 극은 집요하게 드러낸다. 특히 '곤밥', '노몰', '도새기괴기' 같은 표현이 일상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장면에서는, 관객 역시 우진과 함께 언어의 생경함과 낯섦을 체험하게 된다. 우진이 할망의 투박한 손길에 당황하는 순간들은 세계를 인식하는 실패를 코믹하게 보여주면서도, 그 웃음 뒤에는 이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 고립감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감이라는 쓸쓸한 진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강제권 연출이 언어적 소동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진이 할망에게 업히고, 들리고, 돌고, 기어다니는 일련의 장면들은 언어를 넘어선 육체적 소통을 제안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몸짓과 표정, 리듬을 통해 서로를 느끼고 이해하는 순간이 생긴다. 이 과정은 연극 특유의 물리적 리듬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가 언어 이전에도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믿음을 은근하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 교감은 억지스럽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려진다. 연극은 관객에게 언어 이전의 소통 방식을 일깨우며, 결국 소통이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임을 자연스럽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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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의 어감과 리듬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연극 '제나 잘콴다리여'/ 무죽페스티벌 제공
초반의 활달한 소동극적 분위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정서적 농밀함을 얻는다. 우진이 할망, 하르방, 족은할망과 함께 식탁을 차리고, 함께 밥을 먹으며, 제주어 몇 마디를 서툴게 따라하면서 처음에는 버겁기만 했던 낯섦이 점차 친근함으로 변해간다. 언어는 장애물이 아니라 통로가 되고, 제주라는 지역적 배경도 결국 인간 보편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작품은 지역적 특수성을 강조하지만, 그 언어와 관계 너머에 흐르는 감정의 보편성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 관객은 제주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배우들의 억양과 리듬, 몸짓을 통해 대사 너머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읽어내게 된다. 이처럼 '제나 잘콴다리여'는 이해의 논리보다 감각의 논리에 기반한 소통을 지향한다.

배우들의 연기도 이러한 흐름을 힘있게 뒷받침한다. 조옥형이 연기한 할망은 거칠고 고집스러우면서도 한없이 따뜻한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현해냈다. 말맛과 억양을 통해 감정의 미세한 농도를 표현하며, 관객이 할망이라는 인물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게 만든다. 오혜진의 족은할망은 제주어와 표준어를 능숙하게 넘나들며 극의 리듬을 다듬고, 관객과 극 사이를 자연스럽게 잇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신지인의 우진은 초반의 자신감, 중반의 혼란, 후반의 이해에 이르는 정서 변화를 섬세하고 일관되게 이끌어냈으며, 하르방 역할은 강제권과 고인배가 더블 캐스팅으로 참여해 각기 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특히 강제권은 절제와 코믹을 넘나드는 노련한 연기로 극의 균형을 잡았고, 고인배는 또 다른 결의 섬세한 무게감을 덧입히며 작품에 깊이를 더했다. 또한 극중 다양한 인물들을 오가며 장면 전환에 활력을 불어넣는 멀티맨 역할에는 김우석 배우가 참여해, 작은 무대 위에서도 공간의 다층성을 풍성하게 채워냈다. 모든 배우들은 제주어라는 특수한 언어 환경 속에서도 생동감을 잃지 않았고, 언어의 진폭을 이용해 인물 간 감정선을 설득력 있게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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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의 어감과 리듬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연극 '제나 잘콴다리여'/ 무죽페스티벌 제공
'제나 잘콴다리여'는 단순히 제주어를 소재로 한 코미디극이 아니다. 언어를 통해 사람을 기억하고, 낯선 세계 속에서도 결국 마음을 여는 과정을 정성스럽게 그려낸 연극이다. 낯선 말들이 처음에는 장벽처럼 느껴지지만, 어느 순간 다리가 되어 관계를 잇는다. 공연은 관객에게도 그런 경험을 선사한다. 처음에는 어색함을 웃으며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그 낯섦 속에 서서히 감정을 이입하고, 결국은 무대 위 인물들과 함께 따뜻한 교감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무대는 크지 않고 소박하지만, 그 위에 쌓아 올린 감정의 결은 결코 작지 않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은 자연스럽게 제주어 몇 마디를 흉내 내보게 된다. "곤밥" "노몰" "도새기괴기" 같은 단어들이 의미를 넘어 감정의 흔적처럼 남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짧은 한 마디가 오래도록 귓가를 맴돈다.

"제나 잘콴다리여."

이 말 한마디는 고소하고, 샘통이고, 결국은 따뜻한 위로다. 〈제나 잘콴다리여〉는 웃음 너머, 언어와 사람을 기억하게 만드는 연극이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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