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언어 속에서 웃고, 당황하고, 결국은 이해하게 되는 시간
사투리 너머의 세계, 관계의 온도를 빚어낸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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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서울이라는 중심 언어권에 속한 인물 '우진'이 제주라는 낯선 언어권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된다. 무대 위 할망(할머니), 하르방(할아버지), 족은할망(작은할머니)은 거침없이 제주어를 구사하고, 우진은 이를 어눌하게 흉내 내며 당황하고 절망한다. 제주어는 단순한 사투리가 아니다. 대본 곳곳에 살아 숨 쉬는 제주 방언이 등장하며, 언어가 단순한 소통의 수단을 넘어 지역의 문화와 기억을 지탱하는 층위임을 극은 집요하게 드러낸다. 특히 '곤밥', '노몰', '도새기괴기' 같은 표현이 일상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장면에서는, 관객 역시 우진과 함께 언어의 생경함과 낯섦을 체험하게 된다. 우진이 할망의 투박한 손길에 당황하는 순간들은 세계를 인식하는 실패를 코믹하게 보여주면서도, 그 웃음 뒤에는 이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 고립감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감이라는 쓸쓸한 진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강제권 연출이 언어적 소동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진이 할망에게 업히고, 들리고, 돌고, 기어다니는 일련의 장면들은 언어를 넘어선 육체적 소통을 제안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몸짓과 표정, 리듬을 통해 서로를 느끼고 이해하는 순간이 생긴다. 이 과정은 연극 특유의 물리적 리듬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가 언어 이전에도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믿음을 은근하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 교감은 억지스럽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려진다. 연극은 관객에게 언어 이전의 소통 방식을 일깨우며, 결국 소통이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임을 자연스럽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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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도 이러한 흐름을 힘있게 뒷받침한다. 조옥형이 연기한 할망은 거칠고 고집스러우면서도 한없이 따뜻한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현해냈다. 말맛과 억양을 통해 감정의 미세한 농도를 표현하며, 관객이 할망이라는 인물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게 만든다. 오혜진의 족은할망은 제주어와 표준어를 능숙하게 넘나들며 극의 리듬을 다듬고, 관객과 극 사이를 자연스럽게 잇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신지인의 우진은 초반의 자신감, 중반의 혼란, 후반의 이해에 이르는 정서 변화를 섬세하고 일관되게 이끌어냈으며, 하르방 역할은 강제권과 고인배가 더블 캐스팅으로 참여해 각기 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특히 강제권은 절제와 코믹을 넘나드는 노련한 연기로 극의 균형을 잡았고, 고인배는 또 다른 결의 섬세한 무게감을 덧입히며 작품에 깊이를 더했다. 또한 극중 다양한 인물들을 오가며 장면 전환에 활력을 불어넣는 멀티맨 역할에는 김우석 배우가 참여해, 작은 무대 위에서도 공간의 다층성을 풍성하게 채워냈다. 모든 배우들은 제주어라는 특수한 언어 환경 속에서도 생동감을 잃지 않았고, 언어의 진폭을 이용해 인물 간 감정선을 설득력 있게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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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크지 않고 소박하지만, 그 위에 쌓아 올린 감정의 결은 결코 작지 않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은 자연스럽게 제주어 몇 마디를 흉내 내보게 된다. "곤밥" "노몰" "도새기괴기" 같은 단어들이 의미를 넘어 감정의 흔적처럼 남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짧은 한 마디가 오래도록 귓가를 맴돈다.
"제나 잘콴다리여."
이 말 한마디는 고소하고, 샘통이고, 결국은 따뜻한 위로다. 〈제나 잘콴다리여〉는 웃음 너머, 언어와 사람을 기억하게 만드는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