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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한 옛날 인더스 지역의 세계 무역, 문명의 새벽을 연 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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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5. 18. 16:54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38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 왜 하필 인더스강 유역에서 문명이 태동했나?

오늘날 파키스탄과 북인도 지역 인더스강 유역에서 하라파 문명이 태동하기 이전 남아시아 여러 곳엔 이미 신석기 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이후 하라파 문명으로 진화한 파키스탄 서부와 인도 북서부 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물론, 인도 동부의 벵갈-오디샤(Bengal-Odisha) 지역, 북동부 갠지스강 유역, 인도 남부의 타밀(Tamil), 나두(Nadu), 카르나타카(Karnataka) 지역, 서부 아하르-바나스(Ahar-Banas) 지역 등등 인도 아대륙 거의 전역에서 기원전 7000년에서 1500년까지 다양한 신석기 문화가 활달하게 일어났다.

그 많은 신석기 문화 중에서 왜 하필 파키스탄과 북인도 지역에서만 문명이 먼저 형성되었는가? 이 중요한 질문에 관해서 고고학계는 인더스강에 베푼 자연적 혜택을 으뜸의 원인으로 꼽는다. 이집트 문명을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했던 헤로도토스가 하라파 문명의 전성기를 봤더라면 틀림없이 "인더스강의 선물"이라 했을 듯하다. 물론 강의 혜택만으로는 문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 이미 보았듯,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공동으로 대규모 수리 사업에 참여한 다수의 이름 없는 지구인들이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이 문명의 새벽을 열었다는 주장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사실적 언명에 가깝다. 문제는 과연 왜 특정 지역에서 먼저 문명이 발생했냐는 점이다. 왜 서아시아의 다른 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문명으로 나아가지 않았는데, 유독 하라파 지역에서만 문명이 태동하게 되었을까?
모헨조다로(Mohenjo-daro)
인더스강 유역 하라파 문명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모헨조다로(Mohenjo-daro). 사진 맨 앞에 대규모 욕탕 시설이 보인다.
이 질문에 관해선 두 가지 중요한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바로 그 지역이 인도 다른 지역보다 강수량이 적은 비교적 건조한 날씨라는 점이다. 연중 고르게 촉촉이 비가 오는 유럽과 달리 강수량이 적은 건조한 지역에선 어쩔 수 없이 강물을 끌어와 농사를 짓는 관개농업(irrigation farming)이 발달하게 되어 있다. 둘째는 앞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의 원거리 교류다. 하라파 문명은 고립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태동한 문명이 아니었다. 이미 활달하게 꽃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의 접촉은 하라파 문명의 형성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다고 볼 여지가 많다.


◇ 원거리 무역으로 일어난 활달한 도시 문명

먼저 기후 조건부터 따져보면, 하라파 문명 역시 강수량이 적은 건조한 지역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라파에서도 인더스강의 물을 관리하는 수리 사업이 상당히 일어났다. 다만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처럼 중앙집권적 관료행정보다는 지방에 한정된 분권적 수리 공사가 더 빈번했다. 하라파 지역은 비교적 덜 건조해서 관개 시설 없이 빗물만을 사용해서 농사를 짓는 마을도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부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하라파 지역에선 대규모 수력(hydraulic) 농업보다는 계절 몬순에 의존하는 빗물 농사가 더 흔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하라파 문명은 중앙집권적 대규모 수리 공사보다는 분권화된 지방 단위의 소규모 물길 관리가 더 흔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하라파 문명의 발흥 과정을 설명하려면 중앙집권적 관료행정의 지도력보다는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활달한 경제활동에 주목해야 한다. 쌍둥이 도시라 불리는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의 고고학 발굴 현장을 살펴보면, 대번에 시장, 점포 등 상거래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상업적 도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강력한 국가 권력을 보여주는 거석 기념물이나 대규모 신전 등은 보이지 않는다. 농업 생산력의 향상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렸던 하라파 사람들은 육로와 해로를 개척하여 메소포타미아까지 정기적으로 오갔다고 여겨진다.
인더스강 유역 로탈(Lothal)의 부두 모습
고대 하라파 사람들이 원거리 무역을 위해 바닷길로 나아갈 때 사용했던 인더스강 유역 로탈(Lothal)의 부두 모습
하라파 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의 거리는 대략 3000㎞ 정도다. 멀다면 멀 수 있지만,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 고원 쪽으로 가는 육로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해안선을 타고 오만(Oman)만을 거쳐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가는 해로도 이미 열려 있었다고 추정된다. 진흙 태블릿에 적힌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을 보면 멀리 인더스강 유역에서 찾아온 상인들의 존재가 확인된다. 하라파 상인들은 상아, 면직, 목재, 청금석(靑金石, lapis lazuli), 공작새 등을 가져가서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은, 주석, 모직, 올리브유 등을 사서 돌아갔다. 3000㎞의 먼 거리를 왕래하는 원거리 무역이 정기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선 높은 수준의 경제력과 더불어 교통수단의 발달이 필수적이다. 바로 그 점에서 원거리 무역이 이뤄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문명화의 중요한 징표라 할 수 있다. 고대의 원거리 무역 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 선진 문명이 하라파 문명의 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 문명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무역과 상거래로 일어난 도시 중심의 하라파 문명은 대략 기원전 2600년에서 700여 년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1900년경부터 600여 년에 거처 몰락하기 시작했다. 700년의 전성기를 누린 문명이 600년에 걸쳐 쇠퇴의 길을 갔다면 과연 급격한 몰락이라 할 수 있을까? 3000년 가까이 존속됐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문명에 비하면 하라파 문명의 몰락은 분명 급격한 해체의 과정이었다. 과연 왜 하라파 문명은 더 오래 존속될 수 없었을까? 고고학계는 여러 추측만 무성할 뿐 아직 그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토사가 계속 쌓이면서 하라파 문명의 중요한 유적이 강바닥 아래 묻혀 있게 된 데다 하라파 문자를 아직 해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20~1930년대 학계에선 아리안족의 대이동이 하라파 문명을 파괴했다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현재 고고학계에선 이 가설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난 100년간 계속 발굴 작업이 이뤄졌지만, 하라파나 모헨조다로에서 대규모 전쟁이나 파괴의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부 세력의 침략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원인으로 하라파 문명은 몰락하게 되었을까?

일부 학자들은 기상 변화가 하라파 문명 몰락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 주장한다. 계절 몬순이 점점 줄어들면서 인더스강의 수량이 대폭 감소하여 결국 하라파 동쪽 주거지에 환경적 재앙이 닥쳤다는 설명이다. 물의 부족이 건조한 지역을 더욱 건조하게 만들었고, 토지의 염도가 높아져서 농업 수확량이 확 떨어지면서 경제적 곤궁이 닥쳤고, 그 결과 도시 인구가 급감하면서 문명의 몰락이 시작됐다는 얘기다. 이에 덧붙여 지질학자들은 갑자기 지진이 발생하여 지각 표층에 큰 균열이 일어났고, 그 결과 인더스강과 그 지류가 변덕스럽게 물길을 틀면서 일대의 혼란이 야기됐다고 설명한다. 이 밖에도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면서 원거리 무역의 기회가 점점 막혔다는 점을 몰락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학자들도 있다.

서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적당한 시차를 두고서 우후죽순으로 다양한 신석기 문화가 일어났지만, 유독 인더스강 유역에서만 높은 수준의 도시 문명이 발흥했다. 단순히 천혜의 자연 덕분이라 볼 수는 없다. 그보단 오히려 땅길과 바닷길을 열어서 멀리 메소포타미아의 선진 문명을 흡수하려 했던 하라파 사람들의 방랑벽과 개척 정신, 그리고 경제적 풍요를 열망했던 그들의 상혼(商魂)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던 듯하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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