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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종 칼럼] ‘상상의 제국’ 속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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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5. 22. 17:56

정기종 전 카타르대사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로마는 기원전 27년 건국되었다. 그리고 기원후 395년에 동서 로마로 분리되어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각각 1453년과 476년까지 존속했다. 군사력과 로마법 그리고 기독교로 세 차례 세계를 제패했다는 로마제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사를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나누면서 서양 세계관의 기초가 된 기독교의 국교화에는 300년 이상이 걸렸다. 392년 국교가 되었고 네로 황제의 박해를 비롯한 박해 기간에는 수많은 기독교도가 학살되었다. 로마 역사에는 타락한 황제들도 있지만 현명하고 용기 있는 황제들이 많았다.

명군 중 하나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위대한 황후로 일컬어지는 테오도라 황후도 나타났다. 테오도라는 532년 내란에 휩싸인 동로마 비잔틴제국을 떠나 도피하려는 남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만약 지금 목숨을 부지하시기 원하신다면 곤란할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돈도 있고 눈앞에는 바다가 있고 배도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 생각해 주소서.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은 뒤 과연, 죽는 것보다야 나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죽음은 옵니다. 저는 황실의 자주색 옷은 가장 고귀한 수의라는 옛말을 옳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황제를 설득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제국의 안정을 회복했다. 로마의 발전 동력은 종교인다운 종교인과 군인다운 군인 그리고 지도자다운 지도자에서 나왔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서커스 광대의 딸로 태어나 유소녀 시절 무희였던 테오도라는 거친 삶 속에 성장해 강한 신앙심과 정치력을 보여준 애증의 양면을 가진 여인으로 전해진다. "황후의 천성이 불우한 여성들을 돕도록 인도했다. (Theodora's nature always led her to assist unfortunate women.)"고 전기작가 파올로(Cesaretti Paolo)는 당시 기록을 인용해 평가했다. 그녀는 어린 소녀들의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법을 제정했고 도피한 매춘 여성을 위한 안식의 집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빈자와 약자의 보호를 위해 노력해 동방정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함께 성인으로 추대했다. 이 같은 정책이 로마제국의 응집력을 강화했음은 분명하다. 테오도라의 아버지는 핍박받는 천민 크리스천이었으나 세 딸의 이름을 모두 기독교 신앙에 따라 지었다. 장녀의 이름 코미토(Comito)는 '혜성'으로 동방박사를 베들레헴으로 인도한 별을 의미한다. 그리고 차녀 테오도라(Theodora)를 '하나님의 선물'로 그리고 셋째 딸을 아나스타시아(Anastasia) '부활'의 뜻으로 지었다. 부친의 믿음이 딸들에 이어졌고 테오도라 황후를 통해 인간애를 담은 제국의 표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로마로 불리는 미국도 시대별로 국제정세에 맞춘 적절한 정책으로 "자유와 풍요의 제국"을 건설했다. 방대한 영토와 자원을 확보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 천혜의 해양방어선을 좌우에 두고 단계별로 세계에 진출해나갔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퇴임 '고별사(Farewell Address)'에서 외세에 휘둘리지 말고 중립을 표방하면서 국력을 키울 것을 후대에 조언했다. 그리고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력이 성장한 후에는 적극적인 개입정책으로 옮겨갔다. 이승만 대통령의 1912년 프린스턴대학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은 이러한 미국 외교의 가치를 평가했다. 논문은 미국의 저력을 지도자나 정당의 이익이 아닌 국가 전체의 이익을 앞세우는 정책의 힘으로 보았다.

카터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Why not the best?)'에는 해군 장교 근무 당시 핵잠수함 건조에 참여한 경험이 나온다. 카터는 당시 추진 중이던 핵잠수함 건조일정표 PERT(Project Evaluation and Review Technique)를 설명했다. 매 진행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과 물적 인적 자원을 최적 조건에 맞춰 투입하는 성과달성 도표다. 이것을 정확히 준수하고 성실하게 작업하면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는 잠수함이 탄생한다. 이것은 미국 행정부의 국가경영과정에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다.

21세기에 들어 한국은 경이적인 발전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첨단 일류 기업들을 배출했고 문학과 공연예술은 세계에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한국인 봉사활동가들은 지구의 오지에서 어느 국가보다 더한 열정으로 이들을 도우면서 국가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 홍익인간의 DNA를 지닌 한국인의 역량이다. 베네딕트 앤더슨(B. Anderson)의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 개념을 빌려 표현하면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 '상상의 제국(Imagined Empire)'을 건설하는 중이다.

1897년 10월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고종은 황제로 즉위했다. 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 삼대제국의 틈에 낀 약소국 조선이 이들과 동일한 제국주의를 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대한제국의 외교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3·1 독립선언문에서처럼 공의로운 세계를 희구하는 문화국가로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냉전학자 베스타(O. A. Westad)가 '제국과 의로운 국가'에서 한국의 힘을 "의로움(Righteousness)"으로 평가한 것과 같다. 세계와 한국이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은 교만과 허영에 함몰되지 않고 "스토리의 승리와 강한 내러티브는 국력의 근원"이라는 조셉 나이(J. Nye)의 말처럼 우리가 만들고 있는 스토리는 어떤 것인지 성찰할 때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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