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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김주원의 ‘요즘 미술’] 소녀와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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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5. 25. 17:51

아드리안 파이퍼, <인형이 함께 있는 다섯 살 때 자화상>
에이드리언 파이퍼, <인형이 함께 있는 다섯 살 때 자화상>, Oil on canvas, doll, 30 1/2 × 20 5/8 × 4 1/2" (77.5 × 52.4 × 11.4 cm), 1966유명저널'아트뉴스' 선정 2024년 'Top 200 Collectors'의 한 사람인 론티 에버스(Lonti Ebers)의 2022년 기증으로 MoMA의 소장품이 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 미술가이자 철학자 에이드리언 파이퍼(Adrian Piper, 1948~)의 평면 작품 '인형과 함께 있는 다섯 살 때 자화상(Selfportait at age 5 with doll)'은 실제 인형을 그림에 부착하여 새로운 차원의 개인적 서사와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강력한 질문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2018년 뉴욕 현대미술관(이하 'MoMA')에서 열린 그녀의 대규모 회고전 《에이드리언 파이퍼: 직관의 종합, 1965~2016》에서 소개된 이 작품은 개념미술로 대표되는 그녀의 작업 중 미학적 비평적 기회를 드물게 얻게 된 경우에 속한다. 구글링을 해 보면 이 작업에 대한 해석과 비평은 여전히 찾아보기 쉽지 않다.

에이드리언 파이퍼의 MoMA 회고전에는 '인형과 함께 있는 다섯 살 때 자화상'과 유사한 형식의 작업 '인형과 함께 있는 바바라 엡스타인(Barbara Epstein and Doll)'이 나란히 전시되었다. 파이퍼가 겨우 열여덟 살이었던 1966년에 그린 이 두 작품 속 어린 소녀들은 각각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되는 피부색을 지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흑인 소녀 파이퍼 자신과 미국 백인 소녀 바바라는 모두 백인 여자 인형을 들고 있다. 두 작업 모두 캔버스 위에 실제 인형을 부착하였다. 그림 속 백인 소녀는 선명한 빨간 도트 무늬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귀염성 있고 예쁘장한 인형을 들고 있다. 이와 달리, 흑인 소녀 파이퍼는 벌거벗은 채 기괴할 정도로 창백하게 하얀 피부를 드러내며 눈동자가 없는 어둡고 짙은 검은 눈의 인형을 들고 있다. 갈색의 윤기있는 머리카락을 지닌 바바라의 인형과 달리 부서질 것처럼 바스락거리는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파이퍼의 인형은, 결코 안고 싶은 인형, 나와 닮은 인형이 아니다. 오히려 혐오와 저주, 파괴와 폭력, 공포를 충동하는 영화 속 '처키의 신부'처럼 섬뜩한 형상이다.

에이드리언 파이퍼의 두 인형 그림은 1940년대의 유명한 클라크 인형 실험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심리학자 케네스 클라크와 매미 클라크가 주도한 이 실험은 인종에 관계없이 대부분의 아이들이 흑인 인형보다는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백인 인형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이는 역사적 사회적 시스템 속에 강요되어 온 가치 우선주의와 편견 등이 공동체의 욕망과 사회구조를 어떻게 추동하고 편성하는가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백인 소녀 바바라 엡스타인과 흑인 소녀 에이드리언 파이퍼는 모두 클라크 인형 실험에 참여한 아이들처럼 백인 인형을 선택했다.

하지만 파이퍼의 손에 들린 이 백인 인형은 백인의 어린 시절 완벽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없다. 오히려 파이퍼의 인형은 불쾌한 골짜기의 좀비처럼 악몽 같을지도 모른다. 그림 속 흑인 소녀에게 선택된 백인 인형은, 마치 캔버스에서 떨어져 나와 싸구려 B급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를 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감을 준다. 그렇다면 왜 에이드리언 파이퍼는 흑인 소녀의 인형에 이와 같은 공포를 덧씌웠을까.

에이드리언 파이퍼는 뉴욕 맨해튼의 부유한 중산층 흑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기 동안 백인이 중심인 집단에 속한 채 최상층의 교육을 받는 등 자신과 다른 인종에 둘러싸인 삶을 살았다. 사람들로부터 종종 백인으로서 인식될 정도의 백인에 가까운 외모와, 당시 백인 남성 엘리트 중심의 미국 학계와 미술계의 중심에서 활동한 파이퍼는 흑인사회와 백인사회 모두로부터 이방인으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단지 인종적인 차별뿐 아니라 성적인 차별을 이중으로 안고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으로서의 위치와 정체성에 대한 파이퍼의 고민은 백인 인형이 내장하고 있는 '열등감'이나 '자기혐오', 그리고 '백인 선호'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화된 가치'가 쌍생아처럼 구조화된 현대사회 내의 위계적 심리적 문제를 통렬하게 짚어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인종, 젠더, 그리고 이민자 등등의 문제 외에 사회적 경계선에 놓여 있는 그룹은 또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큐레이터·한빛교육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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