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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연민을 유발해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무의미한 부조리의 무한 반복 속에서도, 저마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한 페이지의 여지를 남긴다. 그 위에 적힌 한마디 안녕(Au revoir)이라는 작별 인사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이자 차이가 반복되는 분기점이 된다.
한편,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숨겨진 모티브가 포크송 500마일이다. 1962년 삼인조 혼성 그룹 '피터, 폴, 메리 (Peter, Paul and Mary)'가 데뷔앨범 수록곡에 담아 대중화를 이끌었다. 가사는 단조롭다 못해 미니멀리즘에 가깝다.
당신이 내가 탄 기차를 놓쳤다면 당신은 내가 떠난 걸 알게 될 거예요. 100마일 밖에서 울리는 기적소리가 들릴 거예요. 그 친구가 타고 가는 기차가 멀어질 때까지 기차의 기적이 들릴 겁니다. 100마일, 100마일. 100마일, 100마일. 100마일 멀리에서 울리는 기적소리가 들릴 거예요. 주님, 100마일, 200마일 주님, 300마일, 400마일 주님, 집에서 500마일이나 떨어져 왔어요. 집에서 떠나, 집에서 떠나 집에서 떠나, 집에서 떠나 주님, 집에서 떠나 500마일이나 떨어져 왔어요. 셔츠 한 장도 안 걸치고 돈 한 푼도 없어요. 주님, 이대로는 집에 갈 수 없어요.
500마일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불황기의 미국,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던 하층 노동자들이 불렀던 노래인 호보송(hobo song)에서 유래됐다. 철도원 애가(哀歌)라고도 불리던 일종의 민요로 1960년대 포크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했다. 특유의 애잔한 정서로 미국인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곡이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 떠나온 집에 돌아갈 여비조차 없어, 무일푼으로 떠돌 수밖에 없는 가난한 시절의 비참한 상황을 노래한, 이 곡이 1960년대 호황기에 사랑을 받은 이유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60년대 초, 흑인 민권운동에서 시작해 반전운동에 이르기까지 당대 젊은이들은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고자 했다. 기성세대의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새롭게 포맷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간절함이 차고 넘치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만큼 반작용도 만만치 않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다시 의식화되기 이전, 즉 혁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일종의 의지가 반영된 노래가 바로 500마일이다. 단순히 아버지의 질서에 스크래치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리셋을 외쳤던 이들의 갈증이 채워지기엔 사회변혁이 미미했기에, 그들은 예리코 성을 무너트리듯 사회 비판과 저항의 의지를 포크송에 담아 함께 노래했다.
사실 인사이드 르윈은 1960년대 저항이라는 코드로 대변되는 시대정신을 그려낸 작품은 아니다.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철학적 주제를 담아내고 있다. 매 순간의 선택에 의해 분기되어 드러나는 삶의 단편에 내재한 고단함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선택되지 못한 잠재된 세계에 관해 노래한다. 코엔 형제가 재배치한 플롯은 영원히 회기 될 것 같은 수미상관의 뫼비우스 구조로서, 부조리의 반복이 아닌 전복적 주체가 실천할 새로운 가능성이 무한히 분파된다. 영화의 마지막 크레디트를 주인공의 노래가 아닌, NPC(Non-Player Character)처럼 무심히 등장하는 밥 딜런의 곡으로 꾸며진 이유이다.
영화에 브릿지 쇼트처럼 반복되는 고양이들의 등장이 상징하는 것은 확률적으로 존재가 가능해진 우리 세계를 은유한다. 암컷이거나 수컷이거나 또는 살았거나 죽었거나 그 정체가 불분명한 알 듯 모를 듯한 고양이의 여정은 다양하게 분기될 수 있는 잠재된 상태로서 새롭게 분파될 율리시즈의 고단한 노마디즘으로서 오디세이아를 상징한다.
지난 12.3 계엄 이후 대한민국의 선택은 여러 차례에 걸쳐 분기되었다. 우리 국민이 최종 선택한 관측 가능한 단 하나의 우주는 '민주주의를 지켜낸 세상'이다. 우리의 시민의식은 과거 독재체제로 돌아가기엔 이미 아주 멀리 전진해 나아가고 있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