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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문제가 실종된 대선'은 이후에도 반복되었고, 이번 6·3 대선에서도 안보 문제와 핵문제는 비중에 비례하는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레오 교황이 '조각난 3차 대전'이라고 개탄할 만큼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이어지고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정세도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대선 토론에서 안보와 핵문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정치싸움과 비방전이 대선판을 주도했다.
◇지구종말시계 '자정 전 89초'를 가리키다
미국에는 지구종말시계(Doomsday Clock)를 통해 핵전쟁 발발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과학자단체가 있다. 이 시계는 1947년에 자정 7분 전에서 시작해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탄생에 이어 미·소가 전략핵감축협정(SALT-1)과 요격미사일을 상호 제한하는 조약(ABMT)을 체결한 1972년에는 자정 12분 전으로 물러났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러시아의 핵사용 위협, 이란의 핵개발 지속 등이 어우러진 2023~2024년에는 자정 90초 전을 가리켰다가, 2025년 1월 28일부로 1초가 더 당겨져 지금은 자정까지 89초만을 남긴 23시 58분 31초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쯤 한반도의 핵시계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2025년 1월 미 국방부와 아틀랜틱 카운슬(Atlantic Council)이 백악관 안보회의, 국방부, 합참, 인태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 등의 고위관들과 민간인 전문가를 합쳐 총 60여 명을 참여시켜 실행한 워게임 시뮬레이션에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 후 북한이 대남 전쟁을 도발해 전술핵으로 한국의 공군기지와 해군기지들을 공격하는 데에도 미국 정부는 대북 핵응징을 가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핵응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주한미군사령부뿐이었고 백악관, 국방부, 합참, 인·태사령부 등은 모두 핵응징을 포기하고 재래전력 대응을 주문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북한의 핵사용 시에도 확장억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기절초풍이라도 해야 할 내용이지만, 대다수 국민은 무덤덤했고 이번 대선에서도 화제가 되지 않았다. 암 환자가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하게 되면 자신이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잊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자고로 안보란 주택의 벽체와 같다. 광풍에 벽체가 무너지면 집안에서 가족들이 누리던 큰 행복도 소소한 기쁨도 모두 증발한다. 그래서 전쟁이란 십중팔구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 가능성이 2%로 높아진다면 화들짝 놀라야 하는 것이 전쟁이다. 핵전쟁은 더욱 그렇다. 북한은 핵무기들을 실전 배치한 상태에서 대남 선제적 핵사용을 정당화하고 최고통치자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기만 하면 언제든 핵단추를 누를 수 있도록 한 '핵무력정책법'도 제정한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북한이 핵을 사용하더라도 미국이 핵응징을 포기할 것이라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보도된 것이다. 먹고살기에 바쁜 국민은 그렇다 치더라도, 북한의 결정권자가 대남 핵공격을 가해도 미국이 핵응징에 나서지 않으리라고 믿는 경우 핵전쟁 가능성이 얼마나 더 커질 것인가를 따져야 하는 위정자들에게는 소스라치게 놀라야 마땅한 일이다.
◇혼돈의 핵미래에 현명하게 대처할 새 정부를 기대한다
핵세계에는 태생적 혼란이 상존한다. 서로 다른 목적과 위력을 가진 핵무기들과 상호 상충적인 핵전략과 독트린이 혼재한다. 컴퓨터 오작동, 조기경보 시스템의 오류, 테러세력에 의한 고의적 핵전쟁 유발, 핵사고 등 핵전쟁을 유발하는 비이성적 요인들도 많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에 의해서든 실제로 핵이 사용된다면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아무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사태다. 그 이후는 사실상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암흑의 영역이며, 인류 또는 특정 국가의 운명은 극소수 결정권자의 주관적 인식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서도 그렇다. 어떤 이유에서든 북한이 핵을 발사한다면,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수백 가지가 넘을 것이다. 한국의 대응과 미국의 확장억제 실행 여부에 따라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북한 결정권자의 인식에 따라 제2, 제3의 핵사용이 억제되어 조기에 진정될 수도 있고 확전으로 갈 수도 있다. 질서와 치안이 사라지고 파괴와 생존본능만이 득실거리는 암흑천지가 전개된 최악 사태가 올 수도 있다. 결국 핵사태 이전의 최선책은 억제하는 것이며, 핵사태 이후의 최선책은 확전을 억제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핵사태 발생 이전이든 이후든 최선책을 찾기 위해서는 유화책도 필요하고 힘의 과시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정부와 군은 최선책을 찾을 확률이 가장 높은 정책과 전략을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고, 군 통수권자는 시나리오별 그리고 단계별로 조직적·체계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혜안을 갖춰야 한다.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수상, 인도의 네루 수상,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 일본의 나카소네 수상 등은 그렇게 자국에 맞는 정책을 개발해 국가의 핵운명을 관리했다. 오는 4일 등장할 새 정부도 그렇게 해주길 기대한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전 통일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