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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대전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정의했던 것처럼 평화지향적 민주국가와 전쟁지향적 독재국가 간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혼란과 정치의 무기력으로 서구문명의 몰락이 마치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유럽의 이러한 절망적 분위기 속에서 전체주의 파시시트들이 대안세력으로 등장했다.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그리고 독일에선 히틀러가 마치 니체가 말하는 '초인(Superman)'을 자처하면서 당시 '야만적 볼셰비즘(Barbaric Bolshevism)'과 '타락한 민주주의(Decadent Democracy)'의 위협으로부터 몰락하는 서구문명의 구원자로 나섰다. 그리하여 파시즘의 흥망은 20세기 서양정치사에서 거대한 사건이었다.
많은 자유 민주주의자들은 파시즘을 하나의 극단적 우익의 반동운동이라고 완전히 오해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 속에서 볼셰비즘(Bolshevism)의 피부를 가진 전체주의의 특수한 표명 이상의 어떤 것도 보지 않음으로써 우익 전체주의인 파시즘의 특이한 성격을 모호하게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특수한 민족성, 특히 독일의 민족성의 관점에서 그것을 설명하려고 했고 그리고 또 전례를 위한 역사적 과거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의 선구적 연구로 명성을 얻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전체주의란 우익이나 좌익 혹은 권위주의적이거나 민주적이라는 정치의 전통적 범주를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근대사회의 붕괴를 막고 또 역전하려는 진실로 "새로운 형태의 정부"라고 주장했다. 19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은 파시즘을 "어디에서나 편안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어떤 나라도 자유롭지 않은 시대의 질병"이라고 불렀다. 유럽의 파시즘 발전에는 마르크시즘의 흥망이 결정적 중요성을 가졌다. 자유주의적 낙관주의의 전성기인 19세기 중반 기묘한 통찰력으로 유럽사회의 취약성을 드러낸 강력한 역사철학과 혁명 운동가였던 공산주의자들은 우선 유럽사회를 붕괴지점까지 악화시키고 그러고 나서 다시 마르크시스트 유토피아의 이미지로 유럽사회를 다시 통합시키려는 결의에 차 있었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리고 그 직후 3년 동안 마르크시즘은 기본적인 역사철학적 가정과 정치적 예언의 2가지 관점에서 역사적 수행의 시험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자본주의 국가들에 살고 있는 노동계급은 국가들끼리 서로 대항하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한 나라에서 성공적인 마르크시스트 혁명이 범세계적 혁명을 촉발할 것인지의 여부였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 시험에서 모두 낙방했다. 그 결과 사회의 '과학'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구원자로서 마르크시즘의 신용은 완전히 손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종교처럼 좌익 공산 전체주의는 아직도 중국과 북한 그리고 베트남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전쟁과 혁명의 시련으로부터 민족국가가 피를 흘리고 비틀거렸지만 그러나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럽사회들을 함께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서 등장했다. 제2차 대전을 치르면서 소련 공산주의의 차르 스탈린도 '공산주의' 대신에 러시아의 '애국주의'에 호소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는 계급사회의 건설을 위해 계속해서 민족을 약화시키고 파괴하려고 위협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지적 환상과 정치적 취약성이 명백히 드러났다. 계급이 아니라 민족이 사회의 붕괴와 정치적 아나키(anarchy)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민족의 생존에 대한 바로 그 위협이 민족을 구하려는 광신적 결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익 전체주의 파시즘의 역사적 순간이 들이닥친 것이다.
파시즘은 민족주의와 사회적 혁명에 대한 광신적 호소와 사회의 전체주의적 군사조직을 결합하여 유럽사회를 구원하려고 했다. 이것은 먼저 이탈리아에서 과거 로마제국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무솔리니의 전체주의적 파시스트 정당을 등장시켰고 독일에선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the 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 즉 나치스 당의 이름으로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파시즘은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공산주의와 동일하지만 그러나 전형적으로 수정된 방법으로 적을 파괴하려는 반-마르크시즘이었다. 독일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전체주의의 주된 유형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파시즘은 독특한 유형이 되지 못했다.
파시즘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유산에 대한 보수주의적 반대를 품었다. 이런 추세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에서 강력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현상의 보호를 위해서 교회 및 군주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파시즘도 대체로 인민의 평등주의적 합의하에 정권을 수립하려는 혁명적인 평등주의적 성향을 알고 있었다. 이런 혁명적 추세가 독일 나치즘의 독특하고 지배적인 특징이었다. 그러나 조직된 인민과 엘리트층 그리고 지도자 사이에 직접 민주적 연계를 수립하려는 시도는 지적으로 강력한 루소의 일반의지를 내포했고 또 정치적으로 그것은 1789년의 3가지 여망들 중에서 두 가지의 결합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평등과 박애를 결합하면서 자유를 희생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파시즘은 1789년 자유주의적 여망들에 반대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론 그 과정에서 제아무리 왜곡되고 부패되었다고 할지라도 1789년의 평등주의와 박애주의를 완성시킨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전통적 전제정치(autocracy)와 20세기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전제정치(despotism)는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그것의 의지를 강요한다. 반면에 전체주의는 피치자의 동의로 통치하려고 하고 또 성공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전체주의 국가의 선거는 언제나 어쩔 수 없이 수치이며 또 인민의 진정한 의지를 결코 반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된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서 선거처럼 그것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인민의 의지와 정부 사이의 합의를 표현했다.
그러므로 전체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와 분리하는 것은 정부가 피치자의 동의를 얻는 방식에 있다. 전체주의는 매스미디어의 독점적 지배와 조작 그리고 선동과 선전을 통해 그 동의를 생산한다. 그리하여 인민의 동의가 정부에 제약을 가하지 못하고 정부에게 무제한 자유를 부여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반면에 진정한 민주주의에선 피치자의 동의란 대중의 지지를 위해 서로가 자유롭게 경쟁하는 적대적 세력 간 상호작용의 일시적 결과이다. 여당도 이 경합에 본질적으로 평등하게 들어간다. 여당이 위신이나 영향력 그리고 정보의 덕택으로 가질 수 있는 어떤 이점도 자유경쟁의 원칙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는 다음 선거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가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자신을 불완전한 형태로 전환시켜 전체주의로 타락하는 유혹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의지가 정부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필요한 반면에 민주주의도 역시 인민의 의지가 제한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제한되지 않은 인민의 의지는 다수의 폭정이 되어 정치적 경쟁의 자유를 파괴하고 정부의 권한들을 새로운 다수가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막고 스스로 권좌에서 영구히 머무는 데 사용할 것이다. 경쟁할 자유의 파괴는 경쟁 그 자체의 파괴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것은 바로 좌와 우의 전체주의라고 할 것이다. 윈스턴 처칠은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서로 간 차이보다는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남극과 북극은 지구의 정 반대쪽에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어느 한쪽 극에서 내일 잠에서 깬다면 당신은 어느 쪽 극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한쪽엔 많은 펭귄들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한쪽엔 곰들이 많이 있을 것이지만 주변엔 온통 얼음과 눈, 그리고 매섭게 부는 바람만 있을 것이다." 결국 파시즘과 공산주의 전체주의는 남극과 북극처럼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18세기 자유 민주주의 이론가였던 몽테스키외는 일찍이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동가에 의한, 즉 요즈음의 용어로는, '대중영합주의(populism)'에 의한 '부드러운 전제정치(soft despotism)'의 등장 위험성을 경고했었다. 18세기 부드러운 전제정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준 선전과 선동을 통한 세뇌로 인해 20세기에는 전체주의가 되었다. 20세기 파시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국가적 투쟁을 위해 국가사회의 완전한 획일성과 평화 시에도 전시와 같은 총체적 국민동원체제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그 체제의 거의 필연적 욕구이고 행위이다. 그러나 전 국민의 사상과 행동의 획일성은 민주적 정치과정을 지지하는 기본적 가정의 반대이다. 민주주의자들은 애국적일 수 있지만 그러나 우선, 무엇보다도 모두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은 주된 관심사로서 국가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통치의 어떤 원칙들과 절차에 관한 믿음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 자유, 그리고 정치적 정책결정에 대중의 참여를 강조하는 한, 어느 정도 무질서를 감내해야 한다. 엄격한 수직적 질서와 무조건 복종 대신에 평등과 자기책임이 민주시민의 조망을 지배한다. 개인적 자유에 대한 믿음이 자기표현을 고무하고 생활방식의 다양성과 규범의 다원성을 가져온다. 민주주의는 일정한 한계 내에서 다소 이단적 하위문화(sub-culture)와 광범위한 의견의 존재를 용인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적 문화는 건전한 질서와 적절한 행위에 대한 단일한 정의의 강력한 필요성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부딪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21세기의 전체주의는 20세기 적대적이었던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두 이데올로기가 전술적 필요에 따라 멋대로 결합하는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20세기 전체주의처럼 정치적 억압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술적 합리성과 언론조작을 통한 대중영합주의적 선동과 선전의 유혹으로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전체주의 유혹은 더 위험하고 덜 가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리적 설득보다는 이성적 요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선동과 선전보다는 이성적 토론과 선택을 위해 더욱 애를 써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유를 빼앗김이 없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는 사실상 전체주의일 것이다. 그러므로 감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직 인간 이성에 의지하면서 전체주의의 유혹에 대항하여 끝없는 경계와 지칠 줄 모르는 투쟁을 통해서만 자유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